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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12시 5분전

아침 편지와 9부바지

by G_Gatsby 2010. 2. 2.


날씨가 또 추워집니다.
바지를 사서 세탁소에 줄여달라고 맡겨놨더니 아저씨가 9부바지를 만들어놨습니다. 가뜩이나 길지 않은 다리인데 한없이 짧아 보이네요. 아저씨에게 항의를 했더니 말없이 자기일에만 집중합니다. 덕분에 길이가 많이 짧은 바지를 입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걷는 동안 바람이 솔솔 들어오네요. 추운건 참을수 있지만 짧은바지는 참 창피합니다. 

노란 귤봉지를 든 젊은 부부가 길을 걸어갑니다.
어쩌면 연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날씨가 추운지 서로 꼭 붙어 있습니다. 여자분이 귤을 까서 남자의 입에 넣어줍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사랑이 머금어 있습니다. 행복해 보입니다. 어두워지는 거리를 그렇게 팔장을 끼고 걷습니다. 아마도 두사람은 모르겠죠. 뒤에는 9부바지를 입고 씩씩거리며 걷고 있는 독거인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 1

몇해전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차를 가져오지 않아서 출근시간에 지하철을 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참 많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신문도 보고 책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복잡한 차안에서 말이죠. 엉덩이가 큰 아주머니에게 밀리고 밀려서 노약자석 앞까지 쫓겨갔습니다. 좀 있으면 내려야 하는지라 힘으로 버텨봤지만 제가 감당할만한 힘이 아니더군요. 괜히 힘겹게 버티다가 구두만 밟혔습니다. 서러움 억울함이 밀려왔지만 항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남자분이 옆에 있었습니다.
무언가 품속에서 꺼내더군요. 얼피 보니 백지에 휘갈겨 쓴 편지 같았습니다. 출입구에서 자꾸 미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남자분에게 밀착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봐도 될 편지의 내용까지 보게되었죠. 결코 고의로 본것은 아니었습니다.


"쉽지만 쉽지않은 말"



'사랑하는 자기야'로 시작되는 편지였습니다.
맞벌이 하는 처지라 자주 볼순 없지만 너무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아침밥도 못챙겨줘서 미안하다는 말도 있었구요. 일이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이겨내자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여자는 바쁜 출근시간에도 자신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나 봅니다. 편지를 읽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번집니다. 편지를 소중하게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습니다. 남자의 작은 어깨가 듬직해 보입니다.

내릴곳이 다가오자 남자가 노련한 솜씨로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갑니다. 저도 남자의 듬직한 어깨를 따라 재빠르게 움직입니다. 남자는 엉덩이가 큰 아주머니도 가볍게 밀치고 나아갑니다. 덕분에 뒤를 따라 무사히 차에서 내립니다.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모습이 참 가볍습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을테지요.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는 것같습니다. 

# 2

바쁘다는 핑계로 많은것들을 미루면서 살아갑니다.
그저 뻔한 말과 뻔한 인사치레로 쉽게 '사랑'을 이야기 하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도 특별한 자격이 필요해지고, 결혼을 하기 위해서도 특별한 조건이 필요해집니다. 소박하고 열정적인 사랑은 그저 마음속 한구석에만 있는지도 모르죠. 생각해보면 이렇게 사랑은 아주 쉬울수도, 아주 어려울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요즘 '사랑'은 누군가에 의해서 비교되는지도 모릅니다.
보다 편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에서는 '사랑'의 조건과 기준이 필요한것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늘 공허하고 부족함을 느끼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의 '사랑'이 누군가의 '사랑'보다 멋지길 바라되고 그러면서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보이는 것'에만 집중됩니다. 하지만 '사랑'은 가격표가 붙여져 진열되어 있는 상품이 아닐겁니다. 내것이 되면 식상해지고 또 다른 것에 시선이 가는 그런 상품말이죠. 

값비싼 세상의 어떤 물건보다도, 소박한 아침 편지가 더 소중해 보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겠지요. 느낌없이 되풀이 되는 백번의 말보다도, 진심이 담겨 있는 소박한 말 한마디가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큰 힘이 되겠지요. 누구와의 비교도,어떠한 조건도 필요없는 사랑이기에 후회도 없을것 같습니다. 

 

경비실 아저씨가 저를 보더니 기쁜소식을 전해줍니다.
부부싸움과 쿵쿵거리는 소리 때문에 밤마다 불면의 세계로 나를 끌고 다니던 옆집 부부가 이사를 갔다고 말이죠. 이제 편히 잘 자겠다는 말을 전하며 9부바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습니다. 세상 눈치 보고 살게 뭐 있겠습니까 제멋에 사는 것이죠. 오늘밤에 찾아올 고요함을 즐기면서 소중한 사람에게 짧은 편지 한줄 써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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