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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길을 걷다

회색 고추장 먹기.

by G_Gatsby 2010. 4. 13.

신축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공사장 한켠에서 외국인 청년이 무언가를 마시고 있다.
회색거리에서 자리를 잡고 올라가는 회색 건물 공사장에 회색 작업복을 입은 청년의 모습이 인상 깊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조화로움인지 부자연스러운 풍경인지는 모르겠다.

청년이 마시는 것은 소주였다.
주변에 사람은 없지만 새참 시간 이었는지 여기저기 컵라면과 막걸리가 뒹굴고 있다. 잔도 없이 소주를 마시더니 마른 멸치를 한줌 쥐고 빨간 고추장을 찍어 입에 넣는다. 동남아 쪽에서 온 청년 같은데 우리나라 고추장이 맵지도 않은가 보다. 시원한 소주한잔에 매운 고추장을 입에 털어 넣더니 회색 거리를 멍한 눈으로 쳐다 본다. 노동이 힘들었는지 커다란 눈이 움푹 들어가 보인다.



정신 노동을 하고 난뒤 육체적인 몽롱함을 느끼며 걷고 있는 내 모습과 거친 노동을 하고 정신적인 몽롱함을 즐기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같은 피로감인지 서로 다른 몽롱함인지는 알수 없다. 다만 노동을 마친후 바라보는 눈빛의 몽롱함은 비슷하다. 부끄러운 동질감을 느껴본다.

청년과 눈이 마주친다.
나는 무심코 손을 들고 흔들어 댄다. 안경쓰고 꺼벙한 아저씨가 흔드는 손을 보고 청년은 얼마나 웃겼을까. 하지만 청년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준다.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의 지친 영혼을 달래 주었다. 회색 풍경이지만 빨간 체온을 느낄수 있다.


돌아오는 길, 횡단보도 앞에서 웬 아주머니가 말을 건다.
'예수 믿으세요. 천국이 보입니다!' 아주머니가 건네준 유인물을 받아 쥔다. 아주머니는 어머니 갖다 주라며 한장을 더 준다. 그리고 빨간색 십자가가 보이는 교회를 가르키며 주일에 꼭 오라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어야지만 천국에 갑니까?' 당돌한 질문에 아주머니는 자신있게 말한다. '그럼요, 믿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갈수 없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게 이루어집니다.

절에 다니는 불자지만 아주머니의 성의를 지나칠수 없어 유인물을 쥐고 횡단 보도를 건넌다. 뒤를 돌아보니 아주머니는 자전거를 탄 아이들에게 '천국'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 너머에는 빨간색 등을 단 십자가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우성 부리며 살아가는 세상은 무거운 회색일수 밖에 없다. 노동에 지친 청년이 먹던 빨간색 고추장도, 오만한 인간을 구원 하기 위한 빨간색 십자가도 특별히 다를게 없다. 영혼의 동질감은 살아 숨쉬는 사람만이 느끼는 빨간색 체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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