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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시대유감

잊혀지는 전태일, 다시 오는 박정희

by G_Gatsby 2008.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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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쳥년 전태일"을 보면  청년 전태일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심장소리를 들려준다. 이것은 전태일의 분신으로 새로운 시대가 다시 태어났음을 말한다.

청년 전태일은 1970년,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했다. 그는 불에 활활 타오르는 육신의 고통을 참으며 자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의 죽음으로 당시 2,500개가 넘는 노조가 설립되었고, 비인간적인 생산현장과 기업의 노동착취에 대항한 노동운동은 시작되었다. 그는 스물두살의 젊은 나이에 고통받는 민중의 삶과 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

"목숨, 사회적 정의를 위한 마지막 투쟁"

박정희 군사독재가 권력을 잡고 산업화가 시작되던 시절. 잘살아 보겠다는 국민적 열망은 무엇보다도 컸다. 값싼 노동력의 댓가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하루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대다수인 시절이었다. 우리는 지금 그 시절 피와땀의 댓가를 독재정권이 이룩해놓은 위대한 업적으로만 생각해 버린다.

국민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그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목격한 것은 눈부신 경제성장도, 나아지는 삶의 모습도 아니었다. 부당한 임금체계, 열악한 노동환경, 지켜지지 못하는 반인권적 행동. 스스로의 말처럼 무식했던 전태일이 바라보기에도 그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사회가 이러면 안된다고 법에 호소해 보아도 언제나 법은 권력을 가진자의 편이었고, 있으나 마나한 법은 그에게 큰 좌절감만 안겨주었다.
아무도 소리내지 못하고 숨어 있을때, 전태일은 이 더러운 세상을 향한 마지막 투쟁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불속에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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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은지 38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 사회는 전태일을 잊어 버리고, 경제성장의 모델로 박정희를 다시 부르고 있다.

"우리가 지금 잘 사는가, 다시 생각해볼 문제"

우리가 이루었던 지난 수십년간의 경제 성장은 전 세계가 인정할만한 놀라운 것이었다. 일제 치하의 고난의 시기를 보내자 마자 이어졌던 전쟁의 참담함에서 벗어나 이제 선진국에 문턱에 들어섰다고 한다.
이시기 우리 아버지들은, 하루 14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월남전에 나아가 피의 댓가로 외화를 가져 와야 했다. 권력은 자유를 탄압함으로써 기업을 키웠고, 기업은 부정과 부패를 권력에 안겨 주었다.

수십년전 우리 아버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아직도 치열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권력은 기업을 옹호하고, 기업은 권력을 압박하고, 언론은 국민을 조롱한다.
사회는 군사독재 시절의 경제성장을 미화하고 과거를 그리워 한다.

지난 시절의 경제성장을 정권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에게 감히 물어 본다. 그 시절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대기업들이 이만큼 성장했느냐고. 다른 나라와 같은 사회에서 우리나라와 같은 대기업들이 살아남았을 것이냐고. 역사는 가정할 수 없는 것이고, 권력에 의해서 과거는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의 삶은 나아지고 있지 않다.

"전태일의 피눈물, 경제 민주주의는 지켜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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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우리에게 경제의 수평적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일한만큼 돌려 받고자 했으며, 기업의 경제적 가치속에서 점차 잃어 가는 노동의 소중함을 알려 주었다. 권력앞에 숨죽이는 민중들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인간답게 살 권리를 권력과 사회에 주장하였다.

사회는 성장의 논리속에 브레이크 없는 경쟁의 세계로 몰아간다. 더 가지기 위한 끝없는 욕심을 부추긴다. 그러면서 기업은 살찌고 권력은 견고해지고 우리들은 피폐해진다. 권력은 기업을 위해 규제를 풀고 노동권을 문제삼지 않는다.

기업은 일만하는 로보트를 원하고 권력은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을 마음껏 부풀게 한다. 기업과 권력은 발전하는데 우리는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철저한 부의 계급에 의해서 세습되는 경제적 봉건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권력은 경제적인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인간이 기본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최소한의 경제적 존립은 보장해 주어야 한다. 박정희의 독재권력을 부러워 할게 아니라, 전태일의 아름다운 이상을 부러워 해야 한다.

잊혀지는 전태일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