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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누군가와 보기로 약속했던 영화였지만 약속은 지켜지질 못했다. 꽤 긴 시간이 흘렀고 봄이 되어서야 혼자 볼 수 있었다. 절대적인 시간은 소멸을 가져올 뿐이지만, 상대적인 시간은 소멸만을 가져 오지 않는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도 함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소멸이 아닌 '영원함'을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여자에게 남자는 시계를 맡긴다. 그리고 그제서야 여자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한다. 비록 그것이 얼마 있어 소멸될 짧은 시간이지만 말이다. 여자에게 멈추어 있던 시간은 분노와 혼란. 안개처럼 보이지 않던 과거, 그리고 목적 없는 기다림. 여자는 남자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드디어 앞으로 나아갈 시간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 그저 말랑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서 더 마음에 들었던 영화. 안개 자.. 2012. 4. 2.
일년만 친구 녀석이 느닷없이 결혼을 하겠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며 선언을 했던 녀석이기도 했고, 몇 해전 모임에서 보았을 때에도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녀석이라 조금은 의아스러웠습니다. 꽤 오랜만에 결혼을 핑계로 녀석과 마주 앉아 술을 한잔 했습니다. 녀석은 결혼 소식을 전하느라 얼굴이 빨개졌고, 못 먹는 술을 먹느라 나도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 자기 선언 녀석에게는 꽤 오래 전부터 독특한 술버릇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말이 없는 비관주의자지만, 술만 먹으면 말이 많아지는 비관주의자가 되었습니다. 학창시절 어설프게 쇼펜하우어에 심취한 이후론 친구들과의 대화도 뜸해졌고, 군대에 다녀온 이후론 인도철학에 심취해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마음씨 만은 착한.. 2012. 3. 16.
왕의 귀환, Into the west 한달이 넘도록 긴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옷을 입은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일에 대한 긴장감이 풀린대다 열시간이 넘는 운전에 지쳐서 그랬는지 잠을 깨니 벌써 일요일 아침이었다. 이대론 도저히 살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큰맘 먹고 대형 롤스크린을 사고 프로젝션를 사는 사치를 부렸고, 홈시어터를 연결해서 방 하나를 모두 나만의 영화관으로 만들어 버렸다. 치킨과 맥주가 배달되었고, 첫 상영작으로 무엇을 할까 하는 심각한 고민끝에 선택한 영화는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이었다. 옆집이 뭐라 하건 말건 스피커를 크게 틀어놓고 푹신한 의자에 누워 영화를 보았다. 남자를 좋아하는 간다프를 보면서 환호했고 리즈 테일러의 미모에 흠뻑 젖어 들었다. 진정한 희생은 무엇이며, 용기란 무엇이던가. 그리고 믿음이란 .. 2012. 3. 14.
나는, 나의 첫사랑 회색 나무 아래에 놓인 노란색 벤치 위에 한 노인이 앉아서 무언가를 읽고 있습니다. 한가한 주말 오후, 겨울이 끝자락에 마주선 공원의 모습은 쓸쓸함도 분주함도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시간 속에 정지해 이는 느낌, 노인은 자신을 닮은 늙은 회색 나무 아래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오랫동안 앉아 무언가를 읽습니다. 마치 오래된 엽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그런 풍경입니다. 한참을 걸어 노인의 곁을 지나 갑니다. 노인은 그제서야 책을 덮고 불청객을 바라 봅니다. 노인의 손위에 있는 것은 자그마한 시집이었습니다. 고은 시인이 쓴 '첫사랑'. 돋보기 너머로 불청객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이 맑고 깊습니다. 방해가 될까 서둘러 자리를 피합니다. 노인은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다시 책을 봅니다. 차가운 바람이 다시 공원에 흐르고,.. 2012.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