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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12시 5분전

발자국. 희망을 기억하다.

by G_Gatsby 2009. 1. 31.

   늘 반복되는 시간이지만, 우리는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지난버린 시간과는 좀  다른 시간을 살고 싶은 소망을 담아 낸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르고 이라고 부른다.

   해가 바뀔때 마다, 뭔가 달라져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면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알차고 보람있게 쓰겠노라고 다짐했었다.
학창시절에는 새로운 계획표와 일기장이 곧잘 등장 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좀 더 가지기 위해 욕심을 부려야 했다. 그것은 새해를 맞이 하며 없어서는 안되는, 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흘러 자신의 나약함에 괴로워 하고 년초에 새웠던 목표는 까맣게 잊어 버리곤 했다. 그러한 다짐은 늘 반복되었고 어느새 나이를 먹어 버렸다.


   설날 연휴에 눈이 소복하게 내렸다.
눈이 덮힌 거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진 않았다. 간혹 보이는 사람들의 복장은 어두운색 일색이었다. 겨울에 어두운 색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어두운 옷을 입은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없어서 인지 유독 검은색 옷이 불편해 보였다. 요즘 세상에 그리 즐거운 일이 있을리 만무하지만, 명절이 주는 넉넉한 미소 조차 찾을수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혼자 베실베실 웃음을 지어보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함께 커지는 것 같다. 어릴적 살던곳 뿐 아니라, 눈덮힌 외갓집의 풍경조차 그리워 진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려고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행여 방학이 되어도 가지 못할때에는 전화로 들려오던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울먹거리던 때도 있었다.

   그리워 하던 그 목소리. 이젠 그 목소리를 어머니에게서 느끼게 된다. 목소리에서 전해오는 조건없는 사랑의 염려들은, 어릴적 할머니에게서 느끼던  애틋한 목소리를 많이 닮아 있었다.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새로운 해가 다가올수록 익숙한 풍경들은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 매번 내리는 눈이지만, 내가 꿈꾸었던 시간의 깊이만큼 발자국의 깊이는 깊어간다.
또다시 눈이 내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발자국.
어쩌면 우리의 익숙한 풍경도 이렇게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길을 걷다 보니 내 앞에 두명의 노인이 걸어간다.
노인들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나는 무심코 발자국을 따라 걸어간다. 
나누는 대화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노인이 되어버린 아들과 이제 거동도 쉽지 않게 몸이 굳어 버린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는 노인이 된 아들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길을 걷는다. 두 노인이 만들어내는 발자국의 간격이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나는 노인들을 앞질러 걸어간다.

   노모는 노인이 된 아들을 향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잘은 들리지 않았지만 노모는 머리가 희끗한 아들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가 빠져버린 노모의 말은 불어오는 바람사이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노모의 말을 듣는 아들의 얼굴은 바람때문인지 약간은 상기되어 있다. 그들이 맞잡은 손의 체온이 따사롭게 느껴진다.  잠시 가던길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그들이 그려낸 발자국도 거기서 잠시 멈춘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희망이라는 것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통해서만 볼수 있는 것이라고.

  익숙한 거리에서 나란히 걷는 발자국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저 희망찬 내일이 되기위해서는 무언가 새로운 것들로 나를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살아온것은 아닌지 말이다. 사회는 일반화된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을뿐이다. 내가 그 속에 휩쓸려 나만의 희망이 무엇인지를 느끼지 못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에 지칠때쯤이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희망은 아닐것이다.


이제 숨찬 걸음을 멈춘 노인들을 앞질러 걸어간다.
한참을 걸어가는 순간 뒤에서 노모의 말이 어렴풋이 들려온다.
" 내년에는 여기 못올것 같은데... "

   어느때보다도 사랑과 나눔이 필요한 한해가 시작되었다.
적어도 올해 만큼은 새로운것으로 희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풍경에서의 희망을 찾아 본다. 무수히 걸었던 익숙한  길속에서, 함께 걸었던 사람들과의 따뜻함 속에서 희망을 찾아 본다. 이제 그리움이 되어버릴 소중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찾아본다.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다.
눈은 그쳤으며 거리는 어둠으로 덮혔다. 하지만 노인들이 걷던 길위의 풍경과, 내가 잊고 지냈던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밝게 피어난다. 그 익숙한 풍경에서 나는 새로운 희망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