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이야기/우리시대 동화

너의 왼발이 되어줄께

by G_Gatsby 2009. 3. 19.

아이를 만난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밤이 되면 광화문에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촛불은 활활 타올랐다. 사람들의 인파와 구호는 세상을 날려버릴것만 같았다. 명박산성이 등장하고, 그곳에 구리스가 아름답게 빛을 내던 날, 차가운 아스팔트위에서 아이를 처음 만났다.

인연 하나.

살다 보면 특별히 아는 것도 아닌데 유독 인상이 깊게 남거나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의 끈일수도 있고, 인간과 인간이 느끼는 설명하기 힘든 끌림일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우연히 아이와 마주쳤고, 아스팔트를 따라 걸으면서도 묘한 끌림은 지워지질 않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는 이내 친해졌다.

아이는 왼쪽 다리를 약간 저는 젊은 청년이었다. 때가 묻은 모자와 낡은 스포츠가방을 매고 있었고, 무리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빨리 걸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말라보이는 어깨에 커다란 눈, 상기된 얼굴표정에는  알수 없는 열정이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밤늦도록 길을 걸으며 해충박멸을 외쳤다.

헤어질 무렵엔 서로 연락처를 주고 받았고, 여름이 끝나가기 전에 저녁도 함께 먹었다. 그리고 잠시 잊고 지내다가 해가 바뀌기 전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사는건 맵다.

꽤 추운날이었다. 오랜만에 만에 만난 아이는 두툼한 점퍼를 입고 있었다. 저녁으로 무얼 먹을까 하고 물어 보니 매운 불닭을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매운것을 잘 먹지 못한다. 심지어 라면을 먹을때에도 그 매운느낌 때문에 고민을 해야 할 정도다. 매운것을 먹고 나면 밤새 속이 아파서 고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아이에게 다른거 맛난거 먹는게 어떠냐고 재차 물었다.

" 오늘은 불닭이 꼭 먹고 싶어요. 형님. 하하.."

웃으면서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절대 이길수 없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불닭을 시키고 밥을 곱배기로 주문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날이 추운만큼 음식이 익어 가는 실내는 따뜻했다. 아이는 '설치류 왕조'과 '해충이 우리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미친듯이 이야기 했다. 나는 아이의 말을 들으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서빙하던 아이가 와서 이곳음식이 근처에서는 제일 맵고 맛있다는 자랑을 하고 갔다.  배가 고팠는지 아이는 정말 맛있게 먹었고 나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아이는 고아였다. 부모의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부모는 불편한 다리를 아이에게 물려주고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작은체구의 아이에게는 친구도 없었다.  부모에 대한 원망과 세상에 대한 증오심만을 가지고 살았다. 아이는 고등학교를 마치자 마자 공단에서 일을 해야 했다.

세상과 홀로 마주치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이는 세상의 거대한 벽에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꿈과 희망을 잃어 버리고 사람들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뀌어 갔다. 말없이 교실의 구석에 앉아 있던 아이는 세상에 나와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세상은 정말 맵고 독했다. 공장의 소음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아이의 눈에는, 파도처럼 물결치는 사람들의 인파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따돌림만 받던 아이에게는 무척 공평한 세상이었다. 아이를 위해서 커피를 가져다 주고, 아스팔트위에서 처음보는 사람들과 웃으며 김밥을 먹었다. 아이는 사람들이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세상과 행복에 대한 희망을 느꼈다고 했다.

아이는 이제 사람을 보고 웃는다고 말한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세상과 내가 다르지 않고 함께 어울릴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 더이상 불편한 왼발 때문에 숨죽여 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토록 절망스럽던 외로움도 이제 견딜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한없이 저주했던 불편한 왼발이 이제 더이상 밉지가 않다고 말한다.

아이의 눈에 작은 눈물이 맺힌다. 나도 눈물이 흐른다. 다 큰 어른이 왜 우냐고 말하며 웃는다. 불닭이 내 생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해준다. 아이도 웃고 나도 웃는다. 그렇게 밤이 늦도록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의 왼발이 되어줄께.

도심속의 밤은 빠르게 다가온다. 병원문을 나서는 환자들 앞을 지나가며 불현듯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와 헤어질때 나는 두가지를 약속했었다. 하나는 너의 왼발이 되어 줄테니까 외롭거나 화가날할때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는 것이었고, 매달 책을 한두권씩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오늘도 아이에게 책을 소포로 붙였다.

소포가 도착하면 아이는 늘 싱글벙글 웃는 목소리로 전화를 한다. 아이는 불닭을 먹은 이후로 나를 울보형 이라고 부른다. 공장에서 나는 쇠를 깍는 소음속에 아이의 웃는 모습과 갸냘픈 어깨가 보일것만 같았다. 지난번 아이의 목소리는 무척 밝았다. 불경기속에서도 월급이 5만원 올랐다고 자랑했다. 아마 내일이면 아이가 다시 전화를 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설명하기 힘든 끌림이 있는것 같다. 아픔과 기쁨을 누구나 짊어지고 살아가지만, 그것을 직감으로 알아내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는것 같다. 그래서 인연의 끈은 이렇게 보이지 않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것 같다.

아이의 왼발을 생각한다. 세상의 벽은 높고 인간의 편견은 깊다. 아이의 왼발은 오를수 없는 장벽속에 웅크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외로움일 것이다.  나의 왼발을 쳐다본다. 그저 불편없이 살아왔음에도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투정을 부리고 살아왔는지를 반성해 본다.

봄이오는 길목, 사람과 사람사이에 만들어지는 소중한 인연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나누고 어울려 살아가며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아이는 나에게 소중한 추억과 행복을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다짐해 본다. 비록 부족하지만 너의 왼발이 되어주겠노라고 말이다.




'사는 이야기 > 우리시대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늙은 아들의 소원.  (6) 2009.03.29
스누피 양말의 희망  (12) 2009.03.13
흔들리는 시선 - 사랑한다 친구야  (4) 2009.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