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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시대유감

욕심은 원죄, 변심은 무죄.

by G_Gatsby 2009. 11. 4.

세상은 오늘도 어김없이 시끄럽습니다.
신종플루에 대한 공포가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가소롭게 보다가 막상 그것이 심술을 부리기 시작하니 무서운 세상이 되어버립니다.

누군가는 우리 시대에서, 특별한 사회적 광기가 지배하던 시대를 일컬어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대' 였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던 그 무언가가 우리 시대를 지배하면서 다수의 사람들을 현혹하고 무민하는 그런 시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공포를 안겨주는 무언가가 우리를 협박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욕심은 원죄.

세상을 지배하는 무언가는 인간의 욕심을 사회적으로 정당화 시키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추악한 욕심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편에 있으면 어떠한 방식으로 정당화 시켜 버립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역사적 죄인과 손을 잡은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로 정당화 되었습니다. 경제발전의 명분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탄압하며 민주주의를 군화발로 짓밟은 박정희는 경제발전의 아버지로 정당화 되었습니다. 탈세와 탈법으로 삼성공화국을 만들며 셀수없을만큼 많은 재산을 가지게된 이건희는 존경받는 경제인으로 정당화 되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원죄이며, 이러한 원죄는 자유로운 세상에서 누려야할 인간의 당연한 권리가 되었습니다.


[나랏님 말싸미 원안과 달라]

요즘 문제되고 있는 세종시와 4대강 문제도 생각해봅니다.
경제불황의 여파로 비정규직은 증가하고 있고 고용시장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서민 경제는 의식주 해결에도 버거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당에 막대한 돈을 들여서 4대강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분명한것은 지금 정부가 발표한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이 추가적으로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라발전을 위한 거대한 국책사업은 국민적 동의가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오만한 정권도 국민의 뜻을 어기며 대규모 국책사업을 할수 없습니다. 이미 합의된 세종시는 수정하고, 논란이 많고 합의되지 않은 4대강 사업은 추진한다고 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미디어법도 강행 처리 한다고 합니다. 이번에 지정되는 미디어법은 시행후에는 결코 되돌릴수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것은 권력의 욕심입니다. 자신의 업적을 빠른 시간안에 만들기 위한 자기과시용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말대로 100년을 보고 설계를 한다면 최소한 수년이상의 시간을 들여서 논의하고 토론해야 정상적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비상식의 오만함힘의 논리로 가볍게 넘어갑니다. 인간의 욕심은 원죄입니다. 훗날 그들의 욕심은 또 다른 방법으로 정당화 될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없는 기득권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변심은 무죄

해방 이후의 우리사회가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자유주의 사회로 갈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던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봉건주의에서 벗어나자 마자 식민지 지배에 있었던 사회입니다.

당시 자본을 지배하고 있던 계급은 일본에 협력했거나, 그저 소극적인 저항을 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던 사람들입니다. 일본에 저항하던 사람은 죽임을 당하거나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배계급이 선택할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을 보호해줄수 있는 이승만 정권이었습니다.

이후로, 그들의 화려한 변신은 이어져왔습니다.
반공주의는 이승만정권을 이어가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고, 이후 군사정권을 지탱하게 한 가장 큰 재산이었습니다. 민주화 열풍은 지역을 둘로 갈랐고, 세력이 큰 쪽으로 사람들은 몰려들었습니다. 배고픈 혁명가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일렬로 줄을 서야 했습니다.

이재오가 등을 돌렸고, 김문수가 배신을 했습니다. 군사정권을 옹호하던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적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 또다시 줄을 섰습니다. 달콤한 권력은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고 허영심을 키워주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변심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기름진 배에 새겨진 훈장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만이 내세상~]


세종시 문제로 지탄을 받고 있는 정운찬 씨를 보게 됩니다.
어짜피 예상되었던 수순이고 생각되었던 비판입니다. 학자 출신의 총리는 아직도 순수한 학문적 관점에서 세종시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는 변심과 배신으로 만들어진 진흙탕 같은 곳입니다. 이미지로 만드는 정치판에서 그의 효용가치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일개 장관이 총리를 비판하고, 여당의 여성 정치인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습니다. 권력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두려운 칼날을 총리에게 위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정치적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습니다.

오랫도록 변심은 무죄가 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변심을 정당화 하기 위한 수많은 총알받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가 선택해야 할것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변신일 것입니다. 그것만이 그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살아남아 무죄를 선고받는 유일한 길일것입니다. 물론 역사는 그에게 욕심에 대한 원죄를 물을 것입니다.


함께 잘사는 세상이 비록 이론적인 유토피아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사회를 지향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던 우리의 윗세대는, 주름진 손으로 우리를 어루만지며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악하고 부도덕하게 살아도 된다는 그릇된 현실의식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욕심은 원죄이고 변심은 무죄이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까지 물려줄 위대한 유산은 결코 아닐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