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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12시 5분전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by G_Gatsby 2010. 1. 15.

날씨가 많이 풀렸습니다.
눈 속에 갇혀 있던 회색 도시가 본래의 색깔을 되찾기 시작 합니다. 종종 걸음 치던 아이의 걸음이 빨라지고, 대머리 아저씨의 웅크렸던 어깨가 펴집니다. 학원가는 아이들은 따뜻한 입김을 쏟으며 수다를 멈추지 않고, '를 아십니까'를 포교하는 아주머니의 시선이 매섭게 저를 쳐다봅니다. '을 아십니까'로 컨셉을 바꾸면 사람들이 귀담아 들을텐데 말이죠.

얼마나 오랫동안 옷을 갈아 입지 않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아저씨가 지하철입구옆 양지에 앉아 있습니다. 아저씨가 위에 걸친 것은 본래의 색깔을 알수 없을 정도로 바랜 담요였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씨를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촛점없는 눈동자와 기름조차 흐르지 않고 엉켜버린 머리카락. 때가 타 까많게 변해버린 손과 발. 조그마한 플라스틱 바구니가 아저씨가 가진 전부인것 같습니다.

천원짜리 몇장과 동전을 모두 털어 바구니에 넣습니다.
얼어붙은 목소리로 희미하게 소리를 냅니다.

"감사합..."

날씨가 풀리긴 했어도 거리에 앉아 보내기엔 너무 추운 날씨 입니다. 어두운 지하철 입구로 내려가는 길이 오늘따라 더 어둡게 느껴집니다.



# 1

경상북도 어느 지역으로 파견 근무를 간 적이 있습니다.
급격한 도시화로 인구가 갈수록 줄고 있는 도시의 풍경은 한가로웠습니다. 그곳에서 반년을 보내며 보았던 한 아저씨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릴때 병을 앓았는지 약간 모자란 아저씨였습니다. 길바닥에서 행상을 하는, 칠순이 넘은 노모 옆에서 응석을 부리던 오십이 넘은 아저씨였습니다.

하루종일 아저씨가 하는 일은 시장 길바닥을 오고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리로 왔다가 저리로 가고, 사람들과 부딪치면 인사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 아저씨가 하는 말은 딱 세마디 였습니다.

"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사람들하고 부딪치면 습관적으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누군가 길을 물어도 그 말만 했고 누군가에게 혼을 날때에도 그 말만 했습니다. 그저 할줄 아는 말은 그 세마디 밖에 없는것 같았습니다. 한적한 동네라 아저씨의 특이한 모습이 인상깊었습니다. 이방인인 저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길을 가다가 눈이 마주치면 습관적으로 중얼거리곤 했습니다.

"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 2

노모가 길바닥에 쓰러졌을때 주위에는 난리가 났습니다.
수십년동안 그 거리에서 행상을 하던 노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웃 사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노모와 아저씨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저씨에게 세마디 말을 가르쳤던 늙은 목사님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저씨의 어깨를 어루만졌습니다. 아저씨는 무언가 중얼거리며 성경책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아저씨에게 노모의 영정사진을 갖다 주었습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할머니의 모습을 아저씨는 뚫어지게 쳐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웅얼거리는 소리로 말을 했습니다.

" 미안해요....고마워요....사랑해요..."

아저씨는 노모의 사진을 보며 멈추지 않고 오랫동안 그말만 되풀이했습니다.

노모가 야채를 팔던 그곳에 이제는 아저씨가 앉아 있었습니다. 연두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앞에 두고 얼어 붙은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멍한 눈빛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예전 처럼 거리를 돌아다니지도 않고 마치 동상처럼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주머니를 털어 천원짜리 몇장을 아저씨의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아저씨는 웅크린 다리를 떨며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따뜻한 전철 의자에 앉아서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죄를 짓고 사는것도 아닌데 무엇이 그리 미안할까, 누구 하나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데 무엇이 고마울까, 누구 하나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리 사랑한다고 말할까 하고 말이죠.

어느새 어둑해진 거리를 다시 걷습니다.
거리에는 젊은이들의 웃음과 소음으로 가득차있습니다. 겨울이 춥게 느껴진다는 것이 참 사치스럽게 느껴집니다. 시끄럽고 복잡한 도심 어디선가, 아저씨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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