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봄비를 내려주었지만, 우리는 겨울비라 부르는것 같습니다.
무협지를 읽고 있던 슈퍼마켓 아저씨는 새우깡을 질겅거리며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건 '겨울비' 입니다. 이 비가 겨울비가 되는 이유는 아저씨가 아직 내복을 벗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저씨는 저의 감상적인 질문에 아주 논리적인 답변을 하고선 설날 선물용 참치세트 더미에 기대어 다시 독서에 몰입합니다. 새우깡이 입안에서 터지는 소리가 비소리에 맞추어 경쾌하게 가게안에 울려퍼집니다.
명절이 되면 반가운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도 있구요. 함께 놀던 친구들의 기억도 있습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다가 특별한 날이 되면 더 보고싶은 얼굴들입니다. 살면서 누군가를 그리워 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도 되는것 같습니다. 소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만나 함께 웃는 그날을 그리워 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일을 마치고 우체국에 들렀습니다.
시골에 계시는 외할머니가 드실 간식을 조금 사서 보내드렸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쇠약해지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습니다. 며칠전 전화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제 보고 싶어도 못볼텐데 설날때 한번 내려오라는 말씀이었죠. 흐르는 시간에 나만 나이를 먹는게 아니라는걸 느꼈습니다.
# 1
그라운드에서 쓰러진 임수혁 선수가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야구를 즐겨보는 팬인지라 참 안타까웠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임수혁 선수가 쓰러지던 그날도 제가 직접 그 모습을 본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선수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무척 당황했지만 별일 없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 못했고 10년이 흘렀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믿음, 영원한 그리움이 되다'
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완쾌를 기다렸습니다.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멋진 그의 모습을 기다렸고, 홈런을 치고 멋쩍은 웃음을 짓는 그의 미소를 기다렸습니다.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보며 기뻐하는 그의 모습을 기다렸고 팬들 앞에 환하게 웃음짓는 그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힘든 소망이었던지 결국 그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떠나갔습니다.
10여년간 그를 기다리던 가족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목이 메입니다. 매일밤 기적같은 일을 기다리며 그의 팔을 주물렀을 아이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아마 어느 누구도 그러한 기다림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희망이 바로 기다림이 되는 그러한 시간들 말입니다.
# 2
삶을 이어주는 여러가지 설레임이 있다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설레임도 있구요. 과거에 가졌던 행복한 감정에 대한 사라지지 않는 설레임도 있다고 합니다. 바쁜 시간속에서도 문득 문득 떠오로르는 그러한 설레임이 삶을 지치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작은 힘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설레임의 중심에는 바로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삶을 살아도 누군가를 그리워 하거나 누군가를 보고 설레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유한 삶'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삶에는 누군가를 그리워 하며 지내는 시간들이 소중한 것이죠.
때로는 그러한 그리움의 끝에서 만나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인연이 있습니다. 보고 싶어도 더 이상 볼수 없고, 기억하고 싶어도 자꾸만 희미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워도 더 이상 이어갈수 없는 인연, 그것이 때로는 아픔이 되기도 합니다. 아픔이 그리움으로 바뀔때는 참 힘들죠. 힘들지만 우리의 삶 속에도 그러한 아픔은 자주 찾아오는것 같습니다. 그러한 아픔을 하나둘씩 마음속에서 삭히며 이겨내다가 문득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죠.
그리움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인연에는 못다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오래된 기억은 그대로이지만 세상의 모진 아픔을 겪으면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 있을테니까요. 10년간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겁니다. 그래도 아들이 성장하는 동안 아버지의 모습으로 곁에 있었으니까요. 아버지가 하지 못한 이야기는 마음속에 남겨져 오랬동안 아들을 지켜줄거라 믿습니다.
소포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몇 해전 세상을 떠난 지인이 술을 먹으면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평소에는 생각도 나지 않는 노래인데 길을 걸으며 그 노래자락을 중얼거려 봅니다. 아무리 중얼거려도 특유의 목소리를 흉내내진 못합니다. 아마 이것도 그리움일테지요.
문득 겨울비가 내리는 거리를 더 걷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오늘따라 비가 참 구슬프게 내리는것 같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영원한 이별,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된것 같지만 가슴이 아픈건 어쩔수 없는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런 아픔도 무뎌질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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