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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우리시대 동화

30대, 감추어진 친구의 그림자

by G_Gatsby 2008. 4. 17.

며칠전 한 친구에게서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았다.  일년만에 받는 전화라 반가운 마음과  함께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혹시 돈을 빌려달라는 말은 아닐까 으레 겁을 먹으면서 가는 발길이 가볍지 않다.
무엇이 어릴적 친구도 쉽게 만나지 못하는 막막한 감정을 만들고 있는것일까.

"유독 정이 많았던 친구, 사업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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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유달리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했던 녀석은, 비교적 풍족하게 사는 집안의 외아들이었다. 지방에 살았지만 서울의 알아주는 대학교에 입학하며 미래를 꿈꾸던 녀석은 친절하고 명랑한 최고의 친구였다.

비극은 녀석이 군대를 전역할때쯤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경제적 부담으로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큰 부채를 남기진 않았지만 먹고 살만한 재산도 남기지 않았다. 녀석은  홀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업을 중단한채 컴퓨터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강의실에 있던 우리들과는 달리, 녀석은 돈도 제법 모으면서 사업을 크게 시작한 것 같았다. 취업준비를 하던 우리에게 술을 사주며 큰 회사를 만들어서 스카웃 하겠다고  호기를 부리던 녀석. 가난한 학생이었던 우리들에게 녀석은 영원한 물주이자 친한 친구였다.

하지만,이제 돈벌이가 좀 된다고 말하던 녀석에게 IMF가 찾아왔고, 녀석이 하던 유통업은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 녀석은 친구들에게까지 돈을 조금씩 빌리면서 버텼지만, 주거래처이던 해태전자가 부도를 맞으며 파산을 하게 되었고, 어느날 우리들 시야에서도 사라졌다.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은 친구, 모르척 했던 우리"

녀석이 다시 나타난건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후였다. 수억원대의 부도를 냈다는 녀석은 그동안 무슨일을 했는지 친한 친구들에게 빌렸던 돈을 조금씩 갚고 있었다. 녀석이 사라진후 돈을 빌려줬던 친구들은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한 놈으로 녀석을 몰아갔고, 녀석이 조금씩 돈을 갚을 때마다 친구들의 비난도 소리없이 사라졌다. 녀석은 금융권에 엄청난 부채를 가지고 있음에도 주변친구들 돈을 가장 먼저 갚고 있었다.

몇년사이에 수척해진 녀석의 얼굴은 그래도 희망을 품고 있었다. 녀석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친구들은 한달에 빌린 돈을 송금할때 문자메시지로만 연락을 한다고 했다. 성실하게 살았던 녀석에게 IMF는 수억원대의 부채와 친구들의 외면,그리고 무관심을 던져 주었다. 친구들 돈은 거의 다 갚고 이제 금융권 부채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던 녀석은 초라한 신용불량자가 되어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때마다 친구들은 서로 모여 지난 추억들을 이야기 했다. 친구들 모임마다 대장이 되었던 그녀석은 한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녀석을 찾는 친구들도 없었다. 녀석은 그렇게 우리들 사이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밤, 녀석에게 전화를 한통 받았다. 사실 녀석과 가장  친한친구들 목록에 나는 없었다.
그래서 늦게 걸려온 전화는 의외였다. 녀석은 신용불량 신분 때문에 경제활동에 제약을 받자, 신용회복을 위해서 친구에게 보증을 부탁 했던것 같다. 그 이후 친구와 연락이 되질 않는다며, 친구도 뭐고 다 필요없다고 독백하듯이 말을 쏟아 냈다. 나는 아무런 위로의 말도, 도와주겠다는 말도 할 수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 시간의 빛속에 감추어진 그림자"

그러던 녀석을 1년전쯤 우연찮게 집근처에서 만났다. 녀석이 사는곳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녀석은 너무나 반가워했고 받지 않으려고 뿌리치는 나에게 오천원어치 귤 한봉지를 억지로 건네주고선 자주 연락하자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예전에 보증 때문에 전화했던것이 마음내내 미안했다는 말을 던지면서 말이다.

아마 10년도 넘었을 것 같다. 10년전 녀석이 사업을 할때 도서관에 있던 우리들은 사업 첫개시 기념으로 맘껏 쏘겠다고 직접 찾아온 녀석의 환한 웃음을 보면서, 우리의 자랑스럽고 똑똑한 친구라고 맘껏 추켜 세웠었다. 평생 같이 늙어가자며 계모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호기를 부리던 녀석은 그날 번돈을 모두 탁자위에 쏟아 부으며 술에 주린 우리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3천원짜리 뒷고기집에서 10여년 만에 녀석과 소주한잔을 했다. 떠들석 하게 웃던 10년전 친구들은 이제 더이상 없다. 나는 녀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묻지 않았고, 녀석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녀석은 지난 시간을 이야기 하는대신, 나의 직장생활, 가족들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고 내가 이야기 하는 삶의 소소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 주었다. 신세한탄을 어찌 들을까 싶어 걱정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헤어질 무렵, 한사코 자기가 돈을 내겠다며 성난 표정을 짓던  녀석의 완력에 나는 지고 말았다. 순간 녀석이 돈을 내미는 거칠고 투박한 손을 보면서 가슴이 저며온다. 흰머리가 눈에 띄게 보이는 녀석은 술기운에 발그스레진 얼굴을 나에게 돌리며 웃음짓는다.  나는 알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 가슴 한켠이 저린다.

헤어지는 길에 악수를 하며 짧게 이어졌던 녀석의 말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업을 실패한뒤 채무관계가 있던 친척들과는 연락하지 않은지 오래되었고, 몇해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일을 쓸쓸히 보내기가 너무 외로웠노라고 녀석은 말했다.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정말 궁금했노라고 말하며, 사는게 쉽지 않다 라는 짧은 쓴웃음을 짓고  녀석은 등을 돌렸다.

어릴적 친구들을 반겨주시던 녀석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머니의 기일날, 녀석은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외로움속에 나를 찾았던 것이다. 나는 나의 매정함과 무관심에 한없이 부끄러웠다.

" 잊지 않아야 하는 존재. 친구 "

어릴적 순수함속에 마음을 나누었던 소중한 친구들.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느덧 가정을 꾸리게 되고 서로의 삶속에 쉽게 지쳐 간다. 그리고 함께 만들어 왔던 공존의 시간들을 애써 모른척 하고, 나만의 시간속에서 나오길 싫어 한다. 오는길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석 이야기를 꺼냈더니 반응이 시큰둥하다. 몇마디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자기 딸 이야기로 말을 돌려 버린다.  녀석에게 빌려줬던 돈은 다 받았고 이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지금이 옳은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죽음과 사업실패가 모두 녀석만의 책임은 아닐것인데, 녀석은 10여년이 넘게 남보다 더 독한 무관심속에 사라져 버렸다.

30대 중반, 시간의 빛을 찾아 떠나면서 함께 커져버린 그림자 속에 아름다운 시절의 추억까지 던져버린 모습을 반성해 본다. 그리고 다짐한다. 다음에 꼭 녀석한테 연락이 오면 정말 기쁜 목소리로 대하겠노라고. 그리고 만나면 어릴적 그때 처럼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 주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