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이야기/우리시대 동화

비가오는 길에 마흔아홉살 고아를 만나다.

by G_Gatsby 2008. 6. 19.


지방의 한 도시.
비가 오는 낯선 곳에서 택시를 탔다.
습기 머금고 달려가는 장거리 택시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낯설기만 한데,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돌아오는 운전 기사 아저씨의 인삿말이 친근하다.
네박자 정겨운 트로트 리듬이 울려 퍼지던 택시안.
점잖은척 앉아 있는 내가 신경이 쓰였는지, 라디오 채널을 딴 곳으로 돌린다.가끔 장거리 택시를 타면 무료함을 달래려고 기사 아저씨에게 똑같은 레퍼토리로 말을 건다.

" 요즘 경기 안좋아서 힘드시죠? "

인상좋은 아저씨의 입에서는 전문가 못지 않은 비판과 불만이 터져 나온다. 세상 살기 좋아졌다는 말은 갈수록 듣기 힘들다. 차림새가 좀 수상했던지 무슨일을 하냐고 나한테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십여분이 흘러가니 어느새 가까운 이웃처럼 주고 받는 대화가 따뜻해 진다.

어느새 정치비평을 지나서,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 내는 아저씨.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직업인 만큼 아는것도 참 많다. 비가 와서 그런지 가는길이 더디기만 한데, 우연찮게 서로 고향이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뛸뜻이 기뻐한다. 소주를 들고 경대 북문에서 밤새도록 술판을 벌였다는 아저씨는 80학번 대구 토박이였다.

한때는 돈을 벌어서 장사를 시작했다는 아저씨의 인생 이야기가 시작되고, 빗소리는 점점 커져간다. 직장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서른이 넘은 나이에 번 돈을 모두 털어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결혼도 하고 나름데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때쯤,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암투병을 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병원비 때문에 졸지에 집도 돈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 새롭게 정착한 곳에서 택시를 몰기 시작했고, 인생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와이프도 암선고를 받고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남은 것은 아들 녀석 하나. 애지중지 키우자고 열심히 운전을 했단다. 하지만 3년전에 하나 뿐인 아들 역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가족도 없이 세상에 남은 것은 오직 아저씨 혼자 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내 나이 마흔 여섯에 고아가 됐어요"

정붙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그 악몽같은 시간이 되풀이 될까 두려워, 이제 이웃간에도 정붙이기가 힘들다고 한다. 웬지 고개가 숙여지면서 위로의 말도 할수 없는 당황스러운 시간이 흘러 갔다. 하지만 아저씨는 멋쩍었는지 이내 라디오 채널을 바꾼다. 귀에 익숙하게 울려 퍼지는 네박자 트로트 리듬. 내가 편했던지 몇소절을 큰 소리로 따라 부른다.

혼자 살기 때문에 먹고 사는것도 그만큼 수월하다는 아저씨의 말을 들으며, 주변에 불행한 일이 없었던 내 자신이 무척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가족이 있을때 정말 잘해주고 사랑해 주라고 나에게 당부를 한다. 돈번다고 바빠서 아들녀석 죽기전에 며칠동안 이야기도 못해본게 아직도 한이 된다면서 말이다.

추적 추적 내리는 비가 이젠 심하게 뿌려댄다.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길속에 익숙한 솜씨로 핸들을 움직인다. 마침내 목적지까지 왔을때 내가 할수 있는 말은 "피곤하실텐데 잔돈은 커피 사드세요" 라는 말 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고맙다는 말을 하며 트렁크에서 낡은 우산까지 꺼내서 나에게 안겨 준다. 괜찮다고 몇번이나 사양을 했지만 이것도 인연이라면서 내 옷에 비가 묻을까봐 걱정부터 한다.

유난히 다리가 허약해 보이던 아저씨의 뒷모습을 본다. 살면서 불어오는 고된 바람을 그 연약한 다리로 버티면서도 웃음을 보일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네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은 영원할것 같고, 갑자기 닥친 불행은 견디기 힘들어 보인다. 내가 오늘도 영위하고 있는 가족과 이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다시 가늘어진 빗줄기를 낡은 우산으로 막아 본다. 물이 고여 있는 곳을 여기 저기 피하면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 본다. 잘 보이지 않기에 피하기도 쉽지 않다. 오던 길을 되돌아 가던 택시의 모습이 보인다. 비오고 미끄러운 아스팔트 길을 오늘도 홀로 달리는 아저씨의 모습이 무척 외로워 보인다. 스스로 택한 길도 아닌데...
마흔아홉살 고아,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던 아저씨가 던진 마지막 말을 되새겨 본다.

" 불행이 쏜살같이 오니까 실감이 안나데,  나처럼 혼자 남으면 욕심이 없어져. 그냥 세월 가는데로 허허 웃으며 사는거지 뭐 .옆에 사람이 없으면 아무소용 없어"

늘 외롭다고 투덜거리지만, 세상에 홀로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가족들도 매번 웃으며 지낼수는 없는것, 나이가 들면서 사소한 욕심 때문에 얼굴을 붉혔던 일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이 있기에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홀로 움직이는 오늘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