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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우리시대 동화

바보 형과 길 잃은 강아지

by G_Gatsby 2008. 12. 18.

  아마도 오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살아온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시간의 흔적은 언제나 그렇듯이 잡힐듯 말듯 모호하다. 그 기억은 때맞춰 내리는 겨울비속에 비추어진 풍경만큼이나 흐리고 아련하다.

슈퍼마켓집 외아들.

  어릴적 동네 슈퍼마켓을 하던 아저씨의 집 외아들이 있었다. 꽤나 넉넉한 풍채의 아저씨는 늦게 얻은 아들을 끔찍히 사랑했다. 나 같은 꼬맹이들은 그 아들을 형이라고 불렀다. 몇살 터울이 나진 않지만, 형은 우리들과는 달라 보였다. 마치 부잣집 외동아들처럼 근엄하고 얌전하며, 성숙해 보였다. 아니 무언가 우리들과는 다른 세상의 사람같이 보였다. 형의 눈빛은 다부지고 단호해 보였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이웃분들은 그 형을 보며 총기가 넘친다고 했다.

  까까머리를 하고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형은 고등학행쯤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교 1등을 도맡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형은 조금더 근엄해 보였고, 이웃들은 슈퍼마켓 아저씨를 부러워 했다. 매일 지나치는 슈퍼마켓 유리창속의 아저씨는 늘 넉넉한 미소가 있었다. 늦은밤 공부를 마치고 형이 돌아올때 까지 슈퍼마켓의 불빛은 꺼지질 않았다. 형은 점차 이웃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어느날.형이 갑자기 변했다.
이웃사람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형이 미쳐 버렸다고 했고, 귀신병이 들었다고 했다. 동네사람들은 소란스러워졌다. 넉넉하게 웃음짓던 아저씨가 눈물을 흘리며 병원으로 가던날부터 오랫동안 슈퍼마켓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총기 넘치던 형을 본것은 그것이 마지막 이었다.

  유난히 춥던 그해 겨울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때 다시 형을 볼 수 있었다. 겨울 햇빛이 따스하게 내려쬐던 곳에 형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총기어린 눈빛은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었다. 형은 그저 척박한 아스팔트속 풍경속으로 멍한 시선만을 던지고 있었다. 그 해 겨울이 지나고 새해가 오면서 형은 19살이 되었다.

회상 하나.

  시간은 흘렀고, 놀이터에서 놀던 꼬맹이들은 성인이 되었다. 뿔뿔이 흩어졌던 꼬맹이들은 명절이 되면 용케 몰려들어 하나가 되었다. 고향집은 늘 그리움 이었다. 아저씨의 슈퍼마켓은 조금더 규모가 커져 있었다. 그리고 슈퍼마켓앞에는 작은 의자가 있었고, 그곳엔 형이 앉아 있었다. 형은 푸른 하늘과 메마른 땅을 번갈아 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알수 없는 말을 하곤 했다. 우리는 어른이 되었고 형은 아직도 19살에 머물러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고 우리들의 모습도 바뀌어 갔지만, 형은 늘 19살 까까머리의 모습 그대로 그곳의자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형이 강아지 한마리를 안고 왔다고 했다. 못먹고 병들어 보이는 흰색의 작은 강아지는 금방 죽을듯이 아파 보였다고 했다. 이젠 넉넉한 웃음을 잃어버린 아저씨는 버리라고 한바탕 소동을 부렸다고 했다. 슬픈 눈빛의 강아지를 꼭 안고 있는 형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완강했다고 했다. 그날밤 형은 그 강아지를 품에 꼭 안고 잠들었다고 했다.

회상 둘.

  이젠 또하나의 풍경이 만들어졌다. 죽어가던 강아지는 용케 살아서 형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멍하나 하늘을 바라보던 형은 강아지를 보면서 가끔 웃었다. 그럴때마다 강아지는 꼬리를 신나게 흔들어댔다. 형은 강아지를 지키고, 강아지는 형을 지키고 있었다. 햇살 따가운 여름날에도 그들은 나른하게 먼풍경을 바라 보았고, 그것을 바라보던 나에게도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시간이 꽤나 흘렀다.
형은 아직도 19살의 모습 그대로 멍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형의 몸은 눈에 띄게 수척하고 늙어갔다. 형을 보살피던 아저씨의 허리도 굽어보였다. 형의 옆을 지키던 강아지도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느날 갑자기 모두 사라질것 같은 낡은 풍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웃들은 형이 암에 걸렸다고 했다. 시기를 놓쳐서 이제 얼마 살지 못할거라고 말했다. 노인이 된 아저씨는 매일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총기를 잃은 형의 어깨는 점점더 앙상하게 말라갔고 얼굴빛은 점점더 하얗게 되었다.




  형을 마지막으로 본것은 몇해 전이었다. 바쁜 일이 있어서 부랴부랴 집을 다녀오던 내가 자동차 너머로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형은 어느새 노인의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형의 눈빛은 촛점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너무도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차에서 내려서 인사를 했다. 나를 알아볼리 없는 형은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때, 형의 옆에 있던 하얀색 늙은 개가 형의 다리에서 재롱을 떨어댔다. 멍한 눈빛으로 세상을 보던 형은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때 형의 눈빛에 퍼지는 커다란 기쁨을 보았다. 분명히 형은 웃고 있었다. 눈빛으로 웃고 입술로 웃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은 늙어버린 개 밖에 없는듯 보였다. 죽어가던 자신을 안아주던 형을 향해 늙어버린 개는 너무도 반가운 꼬리짓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늙은 개의 배에는 커다란 종양이 눈에 띄게 보였다. 벌여진 입사이로는 이빨도 잘 보이질 않았다. 형의 모습처럼 어린 강아지도 어느새 늙어 버렸다. 그리고 늘어진 종양의 무게만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 다시 차에 타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풍경은 어느새 흑백사진이 되어 나의 머리에 기억되고 있었다.

비오는 풍경

  다시 내가 고향집을 찾았을땐, 형의 모습도, 늙은 개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다. 슈퍼마켓의 앞에 놓여있던 작은 의자도 보이질 않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물어볼수 없었다. 슬픔보다 더 큰 허전함밀려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버스를 탔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창밖의 풍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차가 출발하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의 풍경은 흘러내리는 빗물로 인해서 서서히 흐리게 변했다. 그리곤 밖의 풍경을 구별하지 못할만큼 비가 퍼부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세상속 풍경을 바라볼수 없었던 형이 죽어가던 어린 강아지를 보듬은 것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영역이 아니라, 본능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상을 바라보던 눈빛을 놓아버린 형과 비슷한 처지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가 이해할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형이 바라보던 세상은, 비오던날 내가 바라보던 차창밖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잃어 버린 형의 모습과, 길을 잃고 아파하던 강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은 어쩌면 같은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잃어버린 세상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며 하나가 되고 있었다. 이제 흑백 사진이 되어버린 그 풍경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세상과 사랑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