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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12시 5분전

개나리공원 가는 길

by G_Gatsby 2010. 3. 23.

주말에 잠시 충청북도 제천을 다녀왔습니다.

15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제사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외갓집에 간 것이 10여년 전인듯 합니다. 아직도 팔순이 넘은 외할머니가 살아 계신데 말이죠. 얼굴을 자주 뵙고 안부를 묻는 것이 어른에 대한 예의겠지만 사는 것이 바쁘다는 변명만 한 것 같습니다.   

 

# 기억 하나

 

오랜만에 무궁화호 열차를 탔습니다.

어릴 때 방학이 되면 외갓집을 찾곤 했습니다. 느린 완행 열차를 타고 자리도 없이 서서 몇시간을 가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동생들을 만나서 이러저리 뛰어놀 생각을 하면 여행의 피곤함 보다 설레임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십 수년이 지나 다시 탄 열차에는 그때의 설레임도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저 한적한 시골풍경에 시선을 던지는 몇몇 사람만이 동행을 했습니다. 양평을 지나고 원주를 지나갑니다. 제법 익숙한 곳인데도 창 밖 풍경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시간은 익숙한 풍경을 다시 낯설게도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어릴적 개울가에서 함께 개구리를 잡던 사촌 동생들은 어린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간간히 뵙기는 했지만 할머니의 기력도 더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관절이 안 좋으셔서 약을 드시는데 그것 때문인지 몇 년 사이에 부쩍 힘들어 보입니다. 시간은 익숙한 사람의 모습에 주름을 만들어 갑니다.

염소를 키우던 작은 동산은 골프장으로 들어가는 초입 도로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옹기 종기 모여 빨래를 하던 작은 개울가는 사라지고 주유소가 들어섰습니다. 흰 눈이 쌓인 밭고랑을 뛰어 다니며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던 다롱이의 모습은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저 지난 기억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듯 흰눈이 펑펑 쏟아져 내립니다.

 

외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개나리공원에도 흰 눈이 내립니다. 힘들게 올라와야 했던 고갯길이 깔끔한 포장도로로 바뀌었습니다. 경치 좋은 곳을 바라 보던 산소 옆에는 묘비로 둘러싸인 큰 동산이 두개나 더 생겼습니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동안 이어지지 못했던 시간의 연결을 잡기 위해 지난 추억을 더듬어야 했습니다. 지난 기억을 통해서 웃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위해서 걱정하고 격려해야 했습니다. 거칠게 퍼붓던 눈보라는,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낸 후에야 포근하고 따뜻한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 느낌 하나

 
돌아오는 기차의 모습은 더 한가로웠습니다. 알랭 드 보통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을 만지작 거립니다. 한적한 기차 안에서 읽어 나가기엔 문체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의 문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를 찾기 힘들다.”

 

이 문장을 생각하며 책을 덮습니다 그리고 창 밖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하며 내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여러 생각들에 집중해 봅니다.

여행의 기술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알랭 드 보통 (이레, 2004년)
상세보기

 

우리는 언제나 시간 여행을 떠납니다.

지나온 여행지에서는 기억과 추억이 남고 앞으로 다가올 여행지에 대해서는 기대감과 두려움이 생깁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여행지에서 슬픔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머물고 싶은 여행지에서 아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가끔은 이동하는 순간 순간 흘러온 여행지를 정리하기도 합니다. 잊고 싶은 것은 잊어 버리고 담고 싶은 것은 수첩에 빼곡히 적기도 하죠. 이렇게 하나씩 여행지를 거치다 보면 어느새 들고 있던 여행가방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오겠죠.

 
살면서 우리는 새롭고 흥미로워야 할 시간 여행을 그저 반복되는 일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새로운 곳으로 이동할 차비가 부족하기도 하고, 떠나봐야 별 것 있겠냐는 생각에 안주하기도 합니다. 오랜시간 머물러 있다 보면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죠. 삶의 허전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어쩌면 삶의 성장은 이러한 시간 여행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장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고 떠나면서 순간 순간 나누는 내적인 대화가 또 다른 성장을 만드는 것이죠. 그러면서 우리는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꿈을 꿉니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낯선 곳을 향하는 여행의 기술, 움직이면서 느껴지는 생각의 조각들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멈추지 않고 있는 시간 여행에서도 마찬가지겠죠. 쉼 없이 만나고 헤어지고 기억하면서 멈추지 않고 달려야 하는 것 같습니다.




봄을 상징하는 개나리 공원에 소복하게 흰눈이 쌓이는 장면을 마음에 담습니다.

눈 오는 들판에서 신나게 놀고 돌아온 손주의 언 손을 녹여주던 거칠고 투박하지만 따스했던 체온을 떠올려 봅니다. 수 십년 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의 조각들이 되살아 납니다.
 

 

여행으로 노곤한 몸을 침대에 눕힙니다.

또 다른 여행지를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지만, 아주 먼 기억의 조각들은 꿈에서 잊지 않고 나타납니다. 그때는 어려서 미처 하지 못했던 여러 말들이 떠오릅니다. 언젠가는 말할수 있는 날이 오겠죠. 눈물나게 보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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