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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우리시대 동화

회색빛 풍경, 또하나의 색깔을 찾다

by G_Gatsby 2008. 10. 27.

두 딸을 둔 아버지는 오늘도 어김없이 7시 정각에 길을 나선다.
버스를 타기 위해 걷는 이 길은 지난 십수년동안 변한것이 별로 없다.
시간에 따라 눈에 익은 사람들이 바뀌었고, 계절에 따라 옷차림이 바뀔뿐,  내리막을 걷는 이곳의 풍경은 변함없이 회색빛이다.
감기몸살로 열이 40도까지 올랐을때에도 그는 쉬지 않고 이 길을 걸어 출근버스에 올랐었다.  지독한 가난속에서 살아야 했던 어린시절의 오기가 그에게는 사명감 이상의 어떤 것을 갖게 했다. 그는 듬직한 가장이 되어야 했고 믿음직한 회사직원이 되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 이겨내는 법을 배워야 했다.

" 회색빛 풍경을 그리다 "

유난히 마음씨 착한 첫 아이가 12월 이면 시집을 간다.
사위가 될 사람은 안정된 직장도 있었고 모아놓은 돈도 있었다. 나이에 비해서 과묵했지만 조리 있는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그를 더 마음에들게 한 것은, 딸을 바라보는 예비사위의 사랑스러운 눈빛이었다. 그의 애정과 배려의 눈빛속에서 고이 키운 딸아이의 행복한 모습을 볼수 있을것 같았다. 이제 어느덧 노인이 되고 있는 그에겐 가장 큰 행복이었다.

작년에 사위를 처음 보고 난뒤 결혼을 승낙했다. 그는 딸아이앞으로 되어 있던 적금을 털었다. 그리고 돈을 더 보태 수익성이 좋다는 중국산 펀드를 계약했다. 회사동료와 함께 주식투자도 하기로 했다. 몇달을 망설인끝에 그가 결정한 생애 첫 투자였다. 그리고 그돈이 불어 결혼식때 좀 더 좋은 혼수를 할것이라고 다짐했다. 아침에 출근버스를 타러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차곡차곡 희망을 쌓아가던 그에게 힘든 시절이 찾아왔다. 주식은 연일 하한가를 기록했고, 펀드는 원금을 거의 다 잃어 버렸다. 잘 모르는 전문용어는 귓가를 맴돌았고, 원금은 점점더 사라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설마했던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딸아이는 혼수 준비를 해야 했고 은행의 잔고는 없었다. 

몇년간 힘들게 모은 딸아이의 월급도, 용돈을 줄여 모은 그의 목돈도 모두 날아가 버렸다. 불과 몇달전만 해도 손꼽아 기다리던 딸의 결혼식은 이제 두려운 시간이 되어 버렸다. 밤에는 식은땀을 흘렸고, 아침 출근길의 발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 졌다. 아침 출근길의 풍경은 쟂빛 하늘과 회색 풍경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 오묘한 조화로움, 사랑을 느끼다 " 사위될 사람과 처음으로 술자리를 가졌다.
이제 내 사람이 될 사위의 모습이 무척 듬직했다.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아들의 모습을 보는듯 했다. 이제 자신의 새 아들이 되어줄 사람이었다. 딸의 미래를 함께할 사람이었다. 무엇을 해줘도 아깝지 않을 사람이었다. 가을이 찾아오던 어느 저녁날, 미래를 꿈꾸며 흥겨워 하던 사위 앞에서 그는 목이 메었다. 자신의 우둔한 욕심에 대한 반성이었고, 딸과 사위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사위에게 털어놓았다.

" 어휴, 아버님 뭘 그런걸로 걱정을 하세요. 따님 주신것만 해도 너무 감사한걸요"

사위는 장인될 사람을 위로하기에 바빳다. 그리고 장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돈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사실을 말하기 힘들었을 장인을 위로 했다. 마음이 아팠을 장인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가족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것이라고 말을 했다. 사위의 말에 그는 또다시 목이 메었다.

오늘도 그는 회색빛 풍경속에 길을 걷는다.
한쪽만 닳은 구두 뒷굽도, 얼굴에 깊이 새겨진 주름살도 예전과 다르지 않다. 구부정하게 굽은 그의 허리도 예전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제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바라보는 풍경은 여전히 회색빛이지만 그는 그속에서 또 하나의 색깔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랑은 또하나의 사랑을 낳고, 새로운 사랑은 또 하나의 사람을 향해서 비추고 있었다. 60이 다된 나이에 그는 새삼스럽게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던 딸아이는 오랜만에 그에게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도 정말 오랜만에 딸아이에게 웃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또하나의 가족을 기다리는 설레임이 남아 있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부끄럽기 보단, 또 하나의 가족과 나누게될 사랑의 기쁨이 더 크게만 느껴진다. 함께 마주보고 웃던 모습을 기억하며 그는 오늘 회색빛 풍경속에서 또다른 색깔을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