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를 처음 만나게 된것은 5년전 이었다.
당시 한 모임에서 돈을 모아 독거노인들에게 틀니를 선물하는 행사가 있었다. 보살핌없이 홀로 살아가는 노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있었고, 뜻이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았다.
서른을 넘긴 나이. 하나의 길만에 집중하며 걷던 나에게는 뭔가 다른 세상의 풍경이 필요했었다. 이제 조금은 나만의 세상에 익숙해져 간다는 자만심도 있었고, 조금 가진것을 자랑하기 바빳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진정한 어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나와는 다른 또다른 풍경에 대한 호기심만이 더 컸던 시절이었다.
초여름이 찾아오던 어느날. 경기도 연천의 작은 마을에서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다.
하나의 기억.
두평 남짓한 방에서 혼자 생활하는 할아버지는 키가 컸고 체격이 좋았다.
선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입가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마치 오래된 손주들이 온것처럼 기뻐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온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햇볕이 따갑던 여름날 오후, 우리는 그렇게 어색하지 않은 첫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틀니를 입에 넣자, 할아버지는 훨씬 젊어 보였다.
미리 준비해간 쌀과 김치로 할아버지와 점심을 함께 먹었다. 이제 이빨이 생겼으니, 물에 김치를 씻지 않고도 먹을수 있다고 할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우리도 그모습을 보며 기뻐했고, 두평 남짓한 공간에서 함께 먹는 점심은 너무도 맛있었다. 서로 나누는 즐거움은 그렇게 모두에게 웃음을 주고 있었다.
떠나오던 길에, 우리는 돈을 조금씩 모아 드렸지만 할아버지는 받지 않았다. 돈이 필요없다고 한사코 거절했다. 함께 동행한 복지사가 커피와 담배를 사드리는게 좋겠다고 말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웃에 사는 노인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며 담배를 태우시는걸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즐겨피우시는 88담배 4보루와 커피믹스 2봉지를 사서 드렸다. 할아버지는 무슨 대단한 선물을 받는양 무척 기뻐하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할아버지의 웃음을 기억했고 나눔의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 했으며 앞으로도 자주 찾아 뵙자는 다짐을 했다. 할아버지의 낡은 구두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달 방문에는 한명이 급한일로 빠지고, 여섯달이 지난뒤에는 세명만이 찾아 갔으며, 조금 더 지난 이후에는 나만이 홀로 찾아가게 되었다.
하나의 배움.
70이 넘은 할아버지는 언제나 정정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무렵, 할아버지는 꽤 오랜 시간을 나와 마주 앉아 이야기 했다. 매월 15일이면 찾아가는 나에게 할아버지는 손수 커피를 타주셨다. 봄햇살은 두평남짓한 할아버지의 보금자리에도 빠지지 않고 비추어 주었다. 세상은 바삐 돌아가고 있지만, 이곳은 아주 느리게만 흘러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독한 88담배를 입에 물고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커피와 담배는 사치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동네 노인들과 함께 나누곤 했다. 평생 가진것 없이 살았지만 늘 행복했노라고 말했다. 몸을 눕고 다리를 뻗을수 있는 이 공간이 천국이라고 말했다. 하늘나라의 문턱에 들어선 나이에, 더이상의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연락처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 주었다. 혹시나 필요하면 언제든지 달려오겠노라고 말했다. 돌아가려는 순간, 할아버지는 큰 소리로 내이름을 부르며 고맙다고 말씀 하셨다. 이름을 부르는 할아버지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함께 웃었다.
돌아오는 길에 함께 방문한 복지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할아버지의 고향이 어딘지도 모르고, 자식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수년전 그저 흘러들어오다 시피 이곳에 들어왔고, 도시로 떠나 폐가가 된 곳을 수리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고 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본적지에 있는 주소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이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것의 전부였다.
아마도 어릴적 일찍 세상을 뜨셨던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봤는지도 모른다. 점차 희미해져 가는 그 기억을 할아버지를 통해서 다시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따뜻하고 포근한 할아버지의 품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가지기 위해서 치열하게 사는 내 주위의 풍경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돌아오는 길에 매번 느꼈다. 치열한 경쟁은 사랑 보다는 미움을 만들었고, 행복보다는 불행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지혜로워져야 한다는 것도 느꼈다. 홀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할아버지는 늘 웃고 있었다. 잠을 잘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이웃과 나눌수 있는 사랑이 있었으며 세상을 향해 웃을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세상은 점점 더 바빠져 갔다.
내 주변의 풍경도 점점 더 바쁘게 움직였다. 돌아보는 것은 사치였고 난 앞을 보며 달려야만 했다. 할아버지를 방문하는 횟수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가끔 방문할때마다 할아버지는 잊지 않고 나의 이름을 기억해 주었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겨 주었다. 그리고 작년 봄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할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매월 15일이 되면 할아버지 주소로 담배 4보루와 커피믹스 2통을 붙여 드렸다. 그것이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하나의 그리움.
세상이 많이 어려워 졌다. 뉴스는 살기 어렵다는 비명을 연일 질러댔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올해 10월은 나에게도 유난히 어려운 시간이었다. 15일이 찾아 왔지만 나는 소포를 보내지 않았다. 부담스러운 금액도 아니었지만, 나에게 닥친 위기가 훨씬 크게 느껴졌다. 중단이 아니라 잠시 미루자고 마음을 먹었다. 조금 늦더라도 이해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올해 10월은 유난히 힘든 날들이 이어졌다.
세상은 분명히 지쳐있었다. 나도 분명히 지쳐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고, 잃은것에 대한 후회가 고민스러웠다. 이제 보이지 않는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바라보는 풍경은 모두가 어지러웠다.
늦은 저녁을 먹고 잠시 쉬고 있었다. 유독 며칠동안 깊은 잠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자도 자도 끝없이 이어지는 야릇한 잠의 세계에 빠져서 하루종일 힘들어 했다. 삶에 대한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었다. 꽤나 힘든 시간이었다.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낯선 전화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몇분간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할아버지는 며칠전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특별히 아픈데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다. 죽은 다음날 동네노인에게 발견되어 바로 수습했다고 했다. 동네에서 화장을 해서 강에 뿌렸다고 했다. 유품을 정리하다가 작은 수첩을 발견했고, 수첩에는 나를 포함한 몇명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고 했다. 일찍 전화를 드려야 했는데 뒤늦게 봐서 지금에서야 알려주는 것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것이 그가 말한 전부 였다. 전화를 끊자 알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할아버지는 15일에 내 소포를 기다렸을 것이다. 내 이름 석자가 적힌 상자를 들고 우체부가 오는 모습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담배와 커피를 동네 노인들과 웃으며 즐길 여유를 생각하며 함박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나는 내 짧은 생각이 미워져 한없이 슬퍼졌다. 그것은 표현하기 힘든 슬픔이자 자책감 이었다. 그 조그마한 기쁨도 나누지 못하는 내가 싫어졌다. 모든것은 변명이 될수 밖에 없었다. 나는 오랜시간 먹먹한 가슴을 달래야 했다. 그리고 두고두고 마지막 소포를 전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해야 했다.
할아버지의 웃음이 머물고 있었다. 그 웃음에는 슬픔을 찾을수 없었다. 사람은 세월을 먹으면서 지혜로워지고 넉넉해 져야 한다고 믿게 해주는 웃음이었다. 그것은 늘 포근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것을 잃고 살아가는 시간은 늘 피로감을 안겨 주었다. 내가 피곤한 잠의 세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알것 같았다.
겨울이 찾아오는 밤의 하늘은 어둡고 깜깜해져갔다.
도시는 온통 붉은색 네온사인으로 물들었고, 흥에 겨운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가끔 들려왔다. 술에 취한 행인들의 목소리는 높아져 갔다. 모두가 세상에 취해서 이렇게 살고 있었다. 하나둘 불이 꺼지는 사무실 책상위엔 붙이지 못한 담배와 커피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주소를 마지막으로 적고 있는 내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도시는 온통 붉은색 네온사인으로 물들었고, 흥에 겨운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가끔 들려왔다. 술에 취한 행인들의 목소리는 높아져 갔다. 모두가 세상에 취해서 이렇게 살고 있었다. 하나둘 불이 꺼지는 사무실 책상위엔 붙이지 못한 담배와 커피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주소를 마지막으로 적고 있는 내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사는 이야기 > 우리시대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 형과 길 잃은 강아지 (6) | 2008.12.18 |
---|---|
회색빛 풍경, 또하나의 색깔을 찾다 (10) | 2008.10.27 |
아픔을 버리고 사랑을 배우다. (14) | 2008.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