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일년이 넘었다.
양복을 입은 녀석의 모습도 오랜만에 보았다.
천천히 걸어오는 신부의 모습을 바라보던 녀석의 얼굴엔 표현하기 힘든 기쁨이 묻어 있었다.
햇살이 내리쬐던 어느 여름날, 절룩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녀석은 새로운 삶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꼭 행복한 걸음이 되어야만 했다. 녀석도 웃고, 신부도 웃고, 지켜보던 우리도 웃었다.
아픔이 너무 커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상처가 너무 커서 돌이킬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혼자만 울고 싶을때도 있다. 어떤 위로의 말도 들리지 않고, 희망의 목소리는 멀기만 하다.
" 꿈꾸던 스무살, 좌절을 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설레임 이었다.
그래서 스무살때에는 어른 흉내를 내기에 바빴다. 술과 담배를 찾게 되었고,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그야말로 해방구였다.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 녀석은 운전 면허증을 땄다. 그리고 또래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을 태우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곤 했다. 그렇게 몇달이 지나고 함께 돌아다니던 녀석들도 운전 면허증을 땄다. 녀석의 작은 승용차는 늘 친구들로 만원이었다. 여름이 오자 그들은 작은 승용차에 모여 타고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것이 녀석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늦은밤 길이 익숙하지 않았던지, 부산근교의 어느 국도에서 녀석의 작은승용차는 코너를 돌던 대형트럭의 뒷부분을 정면으로 들이받고 말았다. 그리고 앞자리와 뒷자리에 탄 친구들은 모두 현장에서 즉사했다. 녀석만 운좋게 살아남았지만 한쪽 다리를 잃었다.
개강을 하고 나서야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제 녀석의 순박한 미소도, 빨간색 작은 차도 보이지 않았다. 술렁이며 안타까워 했지만, 누구도 녀석을 찾아서 위로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캠퍼스의 가을은 찾아왔고 축제가 이어졌고 곧 겨울이 찾아왔다. 스무살의 겨울은 꿈과 희망을 찾아 마음껏 부풀어 올랐다.
" 살아남은 자의 슬픔 "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에서 잠시 쉬던 시간이 있었다. 무심코 찾아간 서점에서 녀석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이 녀석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운영하던 서점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녀석은 서점 입구의 카운터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삿말을 건냈고, 녀석의 어머니가 주신 음료수를 마셨다. 갈수록 말이 없어지는 아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돌아오는 길은 꽤나 어두웠다. 가족들이 보여주는 따뜻한 마음도,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의 모습도 무표정한 표정을 바꿀순 없었다. 아마도 자신의 불행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웃고 떠들던 그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대신 원망과 한숨만이 가득차 버렸다. 무표정한 얼굴에 가려진 짙은 그림자는 꿈을 잃어버린 것 이상의 슬픔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켜보는 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해 겨울엔 유달리 눈이 많이 내렸다. 친구들은 모두 복학준비로 들떠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 틈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을 꾸고 보내기엔 겨울은 너무도 짧았고, 눈이 내리던 거리엔 오래된 서점의 불빛이 밤늦도록 꺼지질 않았다.
" 주는 사랑, 받는 사랑 "
올해 추석연휴는 유난히 짧았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집의 풍경은 그대로 였고, 거리에 자리잡은 오래된 서점도 변함이 없었다. 작년 여름에 결혼을 한 녀석에겐 벌써 아들이 생겼다. 다시 찾은 그곳엔 칙칙한 조명대신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홀로 화석처럼 앉아 있던 카운터엔 한살배기 아이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제 자주 찾아 오지도 않는 오래된 친구에게 녀석은 손수 커피를 타준다. 물을 가지러 가는 녀석의 절룩 거리는 다리가 힘차 보인다. 십수년간 그에게 아픔을 안겨 주었던 녀석의 다리는 이제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책 냄새 가득하던 그곳엔 어느새 사랑의 향기가 가득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아버지를 보며 방긋 웃고 있는 아들과, 그 아들을 보며 방긋 웃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다. 지켜 보던 나도 흥에 겨워 함께 웃었다.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지대한 사랑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지대한 사랑은 언제나 영원함을 꿈꾸고, 영원한 사랑은 곧 행복이 되어 버린다. 한 여인의 순수한 사랑이 녀석의 아픔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 사랑은 주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또 하나의 사랑을 만들었다.
이제 자신을 닮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랑을 주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렇게 주고 받는 것이 사랑이며,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의 밝은 빛이 그 길고 아픈 터널의 끝에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십수년전에 꿈을 꾸던 우리들은 이제 더이상 큰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늘 세상과 힘겹게 싸워왔다는 아쉬움만 남았다. 싸워야할 이유조차 희미해져 버렸다. 그리고 싸워야할 이유가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지나쳐온 길을 되돌아 본다. 차츰 어두워져 가는 길위에 그들의 보금자리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 오는 듯 했다.
'사는 이야기 > 우리시대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색빛 풍경, 또하나의 색깔을 찾다 (10) | 2008.10.27 |
---|---|
준호가 외치는 대한민국~! (6) | 2008.09.06 |
건빵 할머니와 커피 할아버지. (12) | 2008.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