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이야기/영화본후.

내일의 기억 - 잊고 싶지 않은것들.

by G_Gatsby 2008. 10. 20.

살아 간다는 것은, 보고 듣고 느낀것에 대한 기억이다.
그래서 하나의 인생은 수없이 많은 감정과 느낌을 기억하는 것이고, 인생이 마무리될때 소중한 기억들을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이어지는, 명백한 생존의 원칙앞에서 인간이 가져가야 할 가장 큰 행복은 수많은 나날을 살아가며 가졌던 행복한 기억이 아닐까 싶다.

츠츠미 유키히코 감독의 영화『내일의 기억』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픈 모습과 행복한 기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창문 너머로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빛난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중년남자의 눈에는 생기가 없다.  한 여자가 그의 앞에 사진을 보여준다. 딸과 손주가 웃고 있는 사진을 바라보는 눈에는 초점이 없다. 여자가 마시는 녹차 찻잔이 예사롭지 않다. 하늘은 황혼이 되고 여자는 찻잔을 매만지며 한모금 녹차를 마신다. 녹차와 함께 남자의 사랑도 마신다.

" 오늘의 기억, 그리고 오늘의 자화상 "

바쁜 도시 생활을 살아가는 이 남자. 조직에 순응하고 조직을 위해서 살아갔다. 회사일을 열심히 하면서 좀처럼 쉴틈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만이 가족을 위하고 자신을 위한 삶이길 바랬다. 조직으로부터 버림받고 싶지 않았고,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헌신적으로 일을 해야만 했다.

조금 있으면 외동딸의 결혼식. 도무지 회사일이 바빠 틈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큰 프로젝트를 맡으며 또다른 도전의식에 사로잡힌다. 사회는 냉정하고 도전하여 얻지 못하면 도태된다. 그렇게 그는 수십년을 평범한 우리의 모습처럼 살아갔다.


그러던 그에게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매일 가던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리고, 미팅 시간을 잊어 버린다. 동료의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고 사왔던 물건을 자꾸 사온다. 분명히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좋지 못한 느낌임은 분명하다.

아내와 함께 병원을 찾기로 했다. 아직 해야할 일이 많은데, 병원가는 것 조차 귀찮다. 하지만 뭔가 조짐이 좋지 못하다. 그의 기억력에 분명 문제가 생긴것은 틀림 없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겹친것 같다. 별일이 아닐거라고 위로해 본다. 아직 그는 49살 밖에 되지 않았다. 한참 젊은데 무슨일이 있겠는가. 이런 걱정도 그에게는 사치일 뿐이다.


그에게 의사는 알츠하이머병을 진단했다. 
그는 이제 뇌의 중요부위가 손상되기 시작했고, 결국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그리고 현대의학으로는 완치가 불가능한 병이다. 그의 인생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수십년간 도전했던 모든것들이 중단되었다.
그는 이제 소중한 기억을 하나씩 잃는 일만 남았다. 그가 보는것도, 보았던 것도 이제 영원히 사라지는 일만 남았다.



외동딸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가 바빠서 신경쓰지 못했던 외동딸은 그렇게 자신을 떠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후회의 눈물이 그의 눈가에 흘렀다. 이제 딸과의 지난 기억조차 희미해져 간다.


젊은 시절 몸바쳐 일했던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그는 이제 사회적 가치가 사라져 버렸다. 그의 병명을 알게된 회사직원들은 그에게 사진에 자신들의 이름을 적어서 그에게 선물한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잊어 버리지 말라는 의미다. 이제 그는 점점 더 기억을 잃어 버리고 그들을 잃어 버릴 것이다. 그가 일했던 회사의 모든일은 이렇게 사진속 이름으로 기억되었다.

" 마지막 기억, 사랑을 기억하다 "

그의 기억력은 점점 더 사라져갔다. 이제 과거의 기억을 하나둘씩 잃어 버리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기억속에서 점점더 사라져갔다. 동네 사람들이 낯설어 졌고, 손녀의 모습이 낯설어 졌으며, 딸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하나씩 겹쳐지기 시작하고, 시간을 넘나드는 기억의 파편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점점 더 죽음으로 한걸음씩 다가갔다. 그것은 두려움이었고, 아픔이었다.

죽음을 앞둔 그가 꼭 기억해야 할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내와 나누었던 사랑이었다. 첫사랑의 아내는 수십년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으로 그에게 남아 있었다. 그가 죽기전에 기억해야 할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은 아내와 나누었던 행복한 기억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의 사랑을 만들었던 그곳으로 떠난다.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던 그곳.
그곳은 그녀를 처음 만나 사랑하게 된 곳이었다. 그곳은 도자기를 굽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는길 곳곳엔 그녀와의 사랑을 나누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그곳으로 다가갈수록 그의 기억은 하나둘씩 사라져 버렸다. 그는 아내와의 행복했던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만났던 그곳에서, 한번도 완성하지 못했던 자신만의 차잔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찻잔속에 그녀와의 행복한 기억을 담고 싶었다.


그곳에서 그는 마지막 기억을 끌어 모은다. 그곳엔 예전 모습 그대로 그의 스승이 남아 있다. 모닥불이 피워지는 그곳에 찻잔을 놓고 밤새 그의 행복한 기억을 그려낸다. 그리고 불꽃이 모두 사라지고 아침이 되었을때 그는 모든 기억을 잃었다.


이제 그를 찾아온 아내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내는 오열하고 그는 덤덤하게 아내를 쳐다 본다.
이십대 젊은 시절에 함께 걸었던 다리는, 이제 50대 중년부부가 되어 다시 걷는다. 그의 기억은 이 다리를 다시 걸으며 모두 사라진다.


이제 그들은 하나의 풍경이 되어 저녁 노을이 지는 창밖을 바라 본다.
그가 사랑했던 기억을 모아서 만들어낸 찻잔은 그의 옆에서 영원히 남아 있다.


감독 : 츠츠미 유키히코
주연 : 와타나베 켄, 히구치카나코
2006년 일본작.

영화는 산파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루하지 않는 감정을 그대로 전해준다. 삶과 죽음이 함께 놓여 있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기억해야 할것들이 무엇이고, 잊지 말아야 할것들이 무엇임을 다시한번 말해준다. 과연 지금 우리에게 기억해야할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랑의 기억이며, 행복한 기억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