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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12시 5분전

호떡의 기억과 마지막 풍경.

by G_Gatsby 2010. 1. 24.

요즘 호떡 먹는 사람이 별로 없는것 같습니다.
동네 어귀에 있는 먹거리 리어카에는 호도과자와 붕어빵이 대세인것 같습니다. 단맛을 멀리 하는 시대라서 그런지, 아니면 먹기에 조금은 성가시기 때문인지 호떡을 파는 곳도 사먹는 사람의 모습도 보기 어렵습니다.

우연히 보게된 호떡가게 앞에 한 아이가 서있었습니다.
아마도 주문을 해놓고 기다리는 모양입니다. 옆에서 보니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입니다. 떨어지는 기억력을 더듬어 보니 같은층에 사는 남자아이입니다. 이제 초등학교를 들어갔을려나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내가 쳐다보는지도 모른채 바삐 손을 움직이는 아주머니의 손에 시선을 모읍니다.

# 하나.

며칠전에 한바탕 소동이 있었습니다.
점차 무거워지는 몸을 견디다 못해 가벼운 산보라도 할 요량으로 나가려는 참이었습니다. 복도에는 할아버지가 아저씨를 세워놓고 심하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들으려고 한것은 아니지만 할아버지의 소리가 워낙 크게 들려서 어쩔수 없이 듣게 되었습니다.

월세가 밀린 세입자가 월세를 받지 못한 할아버지에게 꾸중을 듣는 장면이었습니다. 바람이 아직도 차가운데,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아저씨의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습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할아버지의 욕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듣는 제가 무안할 정도의 말이었습니다.

아저씨의 등뒤로 조그마한 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는지 아이의 눈빛도 긴장한것 같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할아버지의 욕설을 듣고 있는 아빠의 뒷짐진 손을 살며시 잡습니다. 할아버지의 욕설에 놀란건지, 힘들어 하는 아빠에게 힘을 주려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들었습니다. 다음주 화요일 이사를 오기로 했으니 월요일날 짐을 빼라는 말이었습니다. 침묵하던 아저씨가 말을 던졌습니다. 2월까지만 기다려주세요. 겨울이니까 2월까지만..

월세가 밀려서 다투는 장면은 처음 보았습니다.
월세를 받아서 살아가는 할아버지와 월세가 밀려 사정하는 아저씨의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도 옳지 못한것 같습니다. 그저 살기 힘든 세상이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길이 없지만 월세가 많이 밀린 모양입니다. 같은 층에 사는 것도 알지 못했지만 양말도 신지 않은 아저씨의 초췌한 모습이 잔상처럼 남습니다.

# 둘.

어릴적 개척교회 목사님의 인자한 모습이 기억에 납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빈곤한 예배당 사무실에서 코흘리던 아이를 모아놓고 호떡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시장에서 팔던 호떡과는 비교가 될수 없을만큼 큼지막하고 두툼한 호떡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 목사님의 사랑을 먼저 느낄수 있었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뜨거운 불판에 밀가루 반죽을 넣고 아이들의 눈을 하나하나 쳐다 봅니다. 그리고 호떡이 익을때 까지 바삐 손을 움직이며 우리에게 '사랑'의 의미를 이야기해주곤 했습니다.

"돌아보면 다르지 않은 것"


하나님은 약하고 어린 양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단다. 너희도 크면 약하고 힘없는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단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사랑을 주기 위해서 살아간단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에서 가장 달고 맛있는 호떡을 먹곤 했습니다. 교회를 다니진 않지만 그때 목사님이 주시던 사랑의 의미를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함께 나눈다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코흘리며 먹던 그 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손에 묻은 설탕물을 입으로 빨아가며 맛있게 먹는 친구들의 모습을 쳐다보곤 했습니다. 그리곤 밖으로 나가 서로의 살을 맞대고 부대끼며 날이 저물도록 뛰어놀았습니다. 



호떡 두개를 받아든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내 옆을 지나갑니다. 아이가 손에쥔 검은 비닐종이 위에 따스한 김이 새어나옵니다.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집으로 달려갑니다. 하나는 아이의 아버지가 먹고, 남은 하나는 아이가 먹을 테지요. 힘들지만 서로의 모습이 어떤 말보다도 큰 위로가 될것 같습니다.


어쩌면 며칠뒤부턴 아이의 모습을 볼수 없을테지요. 뛰어가는 아이의 모습이 마지막 풍경이 될것 같습니다. 서로 알지는 못하지만 아이와 아이의 아빠가 함께 웃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웃고 함께 이겨내다 보면 어느새 봄이 찾아올겁니다. 어둑해진 아파트의 입구로 뛰어가는 아이의 풍경위로 마침내 해가 떨어집니다. 맨발로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사라지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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