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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영화본후.

시(Poetry) - 아름다운 시를 쓰다

by G_Gatsby 2010. 7. 17.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보기 전에는 몇가지 선입견이 있었다.
과연 주인공의 나이에서 느끼는 감정을 내가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고, '시'를 쓰지도, 읽지도,낭송하지도 않는 내가 여백이 많은 이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큰 이질감을 느끼지도 못했고 대단한 공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면 영화의 제목처럼 '시'를 느낀 보고 읽은 다음에 느끼는 감정이 이런게 아닌가 싶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찾아보진 않은것 같은데 작품들을 보니 대부분 본 영화다. 봤다고 모두 이해할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작품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걸 보면 이창동 감독이 주는 영화의 뒷맛은 꽤 강렬한것 같다.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영화가 있고 몇몇 장면들이 남아서 가끔 떠오르는 걸 보면 이것이야 말로 이창동 감독이 바라보는 '인물'에 애착이 나타나는게 아닌가 싶다.



윤정희 라는 전설적인 여배우의 작품을 본적은 없다. 하지만 감독의 말처럼 왜 이 배우가 아니면 영화를 만들수 없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영화를 보면서 풀 수 있었다. 드러내지 않는 감정의 절제와 삶의 무게와 함께 주위를 바라볼줄 아는 배우의 연륜을 느낄수 있었다. 자칫 지루할 수 있지만 보고 나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영화다.

'시'를 쓰기로 마음먹다.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은 시를 쓰기로 마음 먹는다.
이혼한 딸의 아들을 돌보고 영세민으로 지원을 받는 궁핍한 삶이지만, 노인은 결코 우울하지 않다. 불쑥 찾아온 불행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노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온통 아름답기만 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다.
노인은 자신이 바라보는 아름다운 세상에 대해서 '시'를 쓰고 싶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다. 삶의 마지막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노인을 둘러싼 현실은 전혀 아름답지 못하다. 손주와 친구들이 한 여학생을 성폭행 하게 되고 그 여학생이 자살을 하게 된다. 막 피지도 못하고 사라진 여학생의 죽음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세상의 부조리가 펼쳐진다. 사람의 죽음에도 진정성이 없고 그것을 감추려는 모습속에서 진실은 찾을 수 없다. 세상의 추함위선이 나타나고 죽음과 부조리가 나타난다. 하지만 노인은 그러한 현실에서도 '시'를 쓰기 위한 고집을 꺽지 않는다.

영화는 아름답지 않은 현실과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노인의 시선을 번갈아 보여준다.
그러면서 시를 쓰지 못해 고민하는 노인의 모습도 보여준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쓰는 것이 '시'인데 노인의 시선에는 아름다움만 보이지 않는다. 불편한 현실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느끼는 노인의 고민은 켜져만 간다.

아름다운 '시'를 쓰다.

세상에서 아름다웠던 순간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노인은 눈물을 흘린다. 자신에게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흘러버려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 기억을 더듬으며 노인은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아름답다는 것에는 눈물과 아픔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학생이 자살을 한 곳에 이르러 노인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강둑길에서 시를 쓰려고 수첩을 꺼내자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쏟아진 비는 수첩을 모두 적신다. 마치 여학생의 눈물을 암시하는 것처럼.



자살한 여학생의 부모를 찾아 위로하러 가는 길에 떨어진 살구를 보면서 노인은 기뻐한다. 살구는 자신을 던져 희생시킴으로 다음 해의 수확을 기대한다.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노인은 기뻐한다. 그리고 여학생의 부모와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위로와 용서의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논하고 돌아서는 순간에 노인은 문득 무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현실의 고통과 이상의 아름다움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고통을 외면하고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 한가에 대해서 말이다.

아픔을 깨달은 노인은 드디어 아름다운 시를 쓰게 된다.
그 아름다움에는 세상의 고통과 슬픔, 미련과 후회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루지 못한 세상과 다음 세상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다. 아름다움을 말하는 시를 읽는 노인의 목소리와 자살한 여학생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져간 풍경이 펼쳐진다. 물결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간다.

노인의 속죄는 익어서 땅에 떨어지는 살구의 모습과 흡사하다.
다음 세상을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살구의 모습처럼, 자신의 핏줄에 대한 속죄와 죽은 자에 대한 보상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진정한 용서와 고귀한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었다.

감독 이창동 (2010 / 한국)
출연 윤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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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처음과 끝을 같은 장면으로 처리한다.
노인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노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부조리한 현실속에서 공허한 아름다움을 찾는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그리 재미있지는 않다.
'시'가 주는 느낌처럼 여백이 많은 영화다. 영화 중간중간에 여백을 색칠해야 집중할 수 있는 영화다. 그래서 '시'가 주는 느낌과 영화가 주는 느낌이 동일하다. 한편의 시를 본듯한 느낌이 드는 영화다. 마지막에 나레이션 되는 노인의 '시'를 들으며 남은 여백을 충분히 느껴야 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뒤에 무언가를 적는 것이 참 어려운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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