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나무 아래에 놓인 노란색 벤치 위에 한 노인이 앉아서 무언가를 읽고 있습니다.
한가한 주말 오후, 겨울이 끝자락에 마주선 공원의 모습은 쓸쓸함도 분주함도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시간 속에 정지해 이는 느낌, 노인은 자신을 닮은 늙은 회색 나무 아래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오랫동안 앉아 무언가를 읽습니다. 마치 오래된 엽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그런 풍경입니다.
한참을 걸어 노인의 곁을 지나 갑니다. 노인은 그제서야 책을 덮고 불청객을 바라 봅니다. 노인의 손위에 있는 것은 자그마한 시집이었습니다. 고은 시인이 쓴 '첫사랑'.
돋보기 너머로 불청객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이 맑고 깊습니다. 방해가 될까 서둘러 자리를 피합니다. 노인은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다시 책을 봅니다. 차가운 바람이 다시 공원에 흐르고, 노인의 회색 머리가 바람에 흔들립니다.
# 한계령
한 남자가 한계령에 오릅니다. 바람처럼 살다 가고픈 인생이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질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그는 죽기로 결심을 합니다. 발길이 닿는 가장 높은 곳에서 발 아래 놓인 세상을 향해 죽어라 욕을 하고 떨어져 죽기로 말이죠. 사랑은 남자를 배신했고, 남자는 살아갈 힘을 잃어 버렸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 그것만으로 죽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심호흡을 하고 구름 낀 산 아래를 쳐다 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왔던 얕은 언덕과 굽은 길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가슴에서 힘겹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를 듣습니다. 거친 호흡 소리를 듣습니다. 남자는 주위를 둘러봅니다. 아무것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남자는, 죽기 위해 올라왔던 굽은 길을 다시 바라봅니다.
잠시 후, 남자는 다시 산을 내려 갑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힘차게 뛰고 있는 심장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스스로 결심합니다. 살아 숨쉬는 자신을 먼저 사랑하겠노라고 말이죠.
# 나는 나의 첫사랑
어느 방송에 나온 한 시인은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질문을 받고선 이렇게 대답합니다.
살아 숨쉬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선 세상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고 말이죠. 그리고 그 첫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고 말입니다. 시인의 멋진 미소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노인이 앉아 있는 벤치를 다시 바라봅니다.
그리고 노인이 걸어왔던 굽은 길을 바라 봅니다. 어쩌면 노인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기억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는 사랑. 어쩌면 노인의 눈이 맑고 깊은 것도 그 사랑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삶의 고단함을 핑계로 스스로에게 매정했던 시간들을 기억해 봅니다. 내일을 핑계로 오늘의 나에게 비굴했던 시간들을 기억해 봅니다. 어쩌면 '사랑'을 잊고 살아 왔던 건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차가운 바람이 다시 불어 옵니다. 그래도 봄은 찾아 올 것이고 삶의 호흡은 여전히 멈추지 않을 겁니다. 새로운 계절에는 나를 사랑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바람 소리에 용기 내어 말을 꺼내 봅니다.
"나는, 나의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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