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녀석이 느닷없이 결혼을 하겠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며 선언을 했던 녀석이기도 했고, 몇 해전 모임에서 보았을 때에도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녀석이라 조금은 의아스러웠습니다. 꽤 오랜만에 결혼을 핑계로 녀석과 마주 앉아 술을 한잔 했습니다.
녀석은 결혼 소식을 전하느라 얼굴이 빨개졌고, 못 먹는 술을 먹느라 나도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 자기 선언
녀석에게는 꽤 오래 전부터 독특한 술버릇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말이 없는 비관주의자지만, 술만 먹으면 말이 많아지는 비관주의자가 되었습니다. 학창시절 어설프게 쇼펜하우어에 심취한 이후론 친구들과의 대화도 뜸해졌고, 군대에 다녀온 이후론 인도철학에 심취해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마음씨 만은 착한 녀석이어서 친한 친구들 몇 명이 언제나 녀석을 챙겼고, 술을 좋아하는 녀석 덕분에 모임이 있는 날이면 꽤 오랜 시간 녀석의 개똥철학을 들어줘야 했습니다.
녀석에겐 특별한 술버릇이 있었는데 장황하게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나선 늘 덧붙이는 말이 있었습니다. 취직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에는 일년만 더 해보고 안되면 중이 되겠노라 이야기했고, 취업을 하고 난 이후에 적성에 맞지 않다며 고민 할때에는 일년만 더 일해보고 안되면 이민을 가겠다고 선언했죠. 사랑에 빠져 연애를 할 때에는 일년만 더 해보고 안되면 독신으로 살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놀랍게도 녀석이 이야기한 '일년만'은 대부분 성공적이어서 1년 안에 취업을 했고, 1년 안에 승진을 하고 회사에서 자리를 잡았죠. 그 외에도 그가 선언한 '일년만'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아쉽게도 '사랑'만은 예외였습니다.
녀석의 '선언'은 꽤 엄숙한 것이어서 그 뒤로는 줄 곳 변변한 연애 한번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누군가 녀석에게 '일년만'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장난스럽게 물었고, 녀석은 한 시간 넘는 시간 동안 '일년만'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물론 아무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저 해괴한 '자기선언'이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 사랑 이야기
남자들의 수다란 꽤나 경직되고 뻔한 것이어서, 서로의 안부와 친구 들의 근황 이야기가 오고 갔고 쥐와 함께한 4년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그리고 안주가 거의 떨어질 무렵에서야 녀석의 사랑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성격 좋기로 유명한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일년간 지켜보기로 했답니다. 부담스러운 나이차이 때문에 다가서질 못하고 말이죠. 일년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게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죠. 일년간의 지켜봄 끝에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일년간 그녀와의 연애를 시작하게 된거죠.
사랑만 가득할 것 같던 연애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다툼이 있었답니다. 성격차이, 취미차이, 종교차이, 나이차이. 그럴 때마다 이 여자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많이 던졌다고 해요. 하지만 일년간의 지켜봄이 있었기에 변치 않는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일년의 연애기간 후에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다고 합니다. 사랑에 대한 확신이 들게 된거죠.
술잔에 다 비워질 무렵, 녀석의 그녀가 나타납니다. 녀석의 엉뚱한 면과 달리 서글서글한 인상에 목소리가 아주 좋습니다.
서로 마주 보며 싱글 웃어주는 모습이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시간에 지쳐 지낼 때가 참 많습니다. 익숙한 것에 싫증이 날 때도 있구요. 인연에 대해서 지루함을 느낄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인 감정에 따라 행동할 때가 많죠. 우리의 삶에 있어 진지함이라는 것은 섯부른 감정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다시 되물어 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무언가가 우리의 진심이겠죠.
녀석의 오랜 행복을 빌어주며 어둑해진 거리를 나섭니다.
녀석의 엉뚱했던 자기선언이 '삶의 진지함'에 대한 또 다른 해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루의 다짐, 사랑의 깊이, 삶의 무게. 이 모든 것들을 가벼운 감정에 이리 저리 흔들리진 않았는지 반성을 해 봅니다. 시간에 흔들리고 인연에 흔들린다면, 한번쯤 스스로의 마음을 꾸준하게 지켜 볼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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