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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우리시대 동화

감자골, 열두살 수진이를 보다.

by G_Gatsby 2008. 8. 5.


강원도 소도시.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와 바라본 한적한  풍경은 휴식과 정겨움이었다.
사람 살아가는 것이 크게 다르진 않을텐데, 어떤 곳에서는 지독한 외로움에 젖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낯선 풍경도 포근하게 느껴질때가 있다. 긴 시간을 달려온 나를 시원한 바람이 맞이한다.

대화조차 쉽지 않던 외로움을 버리고, 스스로 감자골이라 말하는 이곳에 정착했다는 녀석이 보고 싶어 한걸음에 달려왔다. 삼십대 중반의 노총각.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녀야 하는 나그네 인생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 보는 것이 다르면, 마음도 달라질까? "
 
녀석이 서울을 떠나기전에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녀석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한다. 까맣게 그을린 녀석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함께 겹쳐진다. 예고없는 방문이 그리 싫지 않은 표정이다.

고즈넉한 풍경과 어울려 살아가는 녀석의 얼굴은 편안해 보인다. 녀석이 둥지를 튼곳은 민박과 펜션의 모호한 경계속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휴양지. 푸른 녹음과 계곡의 물소리가 시원하면서 엄숙하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조용하고 사색적인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시골냄새 가득한 뒤뜰에 모기향을 피워놓고 함께 앉아 같은 곳을 바라 본다. 녀석의 흰머리가 유독 눈에 띈다.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편안하다고 한다. 이렇게 삼십대를 훌쩍 넘겨버린 두 사람은 소소한 이야기에 시간 가는줄 모른다.

열두살 수진이.

사람사는 동네의 인심이 그러하듯, 넉넉한 마음을 가진 주인 아저씨가 시원한 수박을 가져다 주신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이방인을 대할 때 수줍은 표정을 살짝 보인다. 그 순박한 미소를 보며 어릴적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손주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크셔서, 이른 새벽에 일어나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던 손길을 느껴본다.

덩치만 큰 펜션에는 주인 할아버지와 손녀 수진이, 그리고 녀석이 살고 있다. 늦게 결혼해 딸만 하나 두셨던 할아버지는 꽤 오래전에 밭을 갈아엎고 펜션을 지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허리 때문에 고생하다가 돌아가신 이후, 밭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한때는 결혼한 딸과 사위가 함께 어울려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성실한 사위를 둔 덕분에 벌이도 제법 괜찮았다고 한다. 그리고 손녀 수진이가 태어나면서 세상이 무척 행복했다고 한다.

행복한 시골 마을에 갑작스러운 사고가 찾아 왔다. 사위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게 되고 모든 것이 급하게 변해갔다. 외동딸은 수년간 힘들어 하다가 어느날 집을 나갔다고 했다. 서른살, 그 젊은 시절에 바라보는 현실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서울 어느 곳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만 들려 온다고 한다. 다섯 살 어린 수진이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서서히 잊혀져 갔다.

이른 새벽에 느껴지는 공기가 차갑다. 그 신선하고도 차가운 공기에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방학인데도 열두살 수진이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다. 내 친구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는 표정에 구김살은 찾아 볼수 없다.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에 녀석은 미소로 화답한다. 그렇게 웃음소리와 함께 감자골의 아침은 시작되고 있었다.

" 딸 이라고 해도 믿겠다. "

뜬금없는 내 농담에 녀석은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옆에 있는 수진이가 녀석의 얼굴을 쳐다 보며 함께 웃는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터인데 둘의 모습은 어디엔가 닮아 있다.

" 딸 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녀석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녀석의 손을 잡고 있는 수진이가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피 한번 섞인 적이 없는 둘은 그렇게 가족같은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손님으로 찾아온 중년 부부가 아침부터 산행길을 재촉한다. 녀석은 밤새 얼려놓았던 시원한 보리차를 건네준다. 열두살 수진이는 옆에서 수건을 챙겨준다. 둘의 호흡이 척척 맞는다. 잘 다녀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합창을 만들어 낸다.

시골의 아침밥상은 단촐하지만 맛이 있다. 재철 음식과 구수한 밥냄새가 마냥 좋기만 하다. 아침을 먹는동안에도 웃음은 떠나질 않는다. 주인과 종업원의 사이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식같은 대화가 오고간다. 밥을 먹고 서둘러 일을 떠나는 녀석과 작별인사를 나눈다. 하루에 두가지 일을 해야만 하는 녀석이 안스럽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고맙다. 인사성 밝은 수진이의 마중을 받으며 집으로 가기 위해 돌아섰다. 낯설었지만 정겹게 느껴졌던 첫인상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라고 생각해 본다.

풍경은, 늘 그 속에 속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빛깔을 가진다. 그래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함께 기대어 살아가는 풍경은 늘 정겨운 빛깔을 가진다. 그리고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을 미소짓게 만든다.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은 슬픈 일이다. 버림 받은 것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 열두살 수진이의 밝은 미소를 생각해 본다. 미움도 슬픔도 당장 이해하기 쉽지 않으면 잠시 잊고 사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 것 같다. 열두살 수진이를 통해서 하나를 배운다.

도심을 벗어난 녀석의 미소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어 본다. 절망하며 살기엔 너무 젋다는 것을 녀석의 힘찬 발걸음을 보면서 다시 생각한다. 지금 가는 길이 고통과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걸어야 할 길이라면 걸어야 할 것이다. 그 경사진 오르막을 힘들게 걸어 오르는 녀석의 삶에 대한 열정에 또 하나를 배운다.

[관련글] : 2008/07/14 - [사는 이야기/우리시대 동화] - 친구, 가리워진길을 보다.

우리가 함께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 같다. 욕심없이 마주보며 웃을수 있는 것.
비단 가족이라는 선천적 울타리가 아니라 할지라도, 서로 의지하며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조용한 시골 풍경속에 오늘도 외로운 사람들이 모여서 삶의 진한 향기를 만들어 내는 곳. 감자골 다녀오는 길, 그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 사는 법을 배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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