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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우리시대 동화

늙은 아들의 소원.

by G_Gatsby 2009. 3. 29.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릴것만 같다.
거리는 한적하고 산아래 나무들은 푸르러 간다. 심술맞던 꽃샘추위도 이제 물러가는것 같다.

개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띈다. 지팡이에 중절모. 쇠잔한 몸에서는 알수없는 꼿꼿한 고집이 풍겨온다. 소박하지만 보기 힘든 할아버지의 한복을 보면서 문득 몇해전 안타까운 기억이 되살아 났다. 봄은 희망을 이야기 하면서 찾아왔지만 기억은 쓸쓸한 감정을 더듬어 간다.

# 시선 하나.

어둠속으로 관이 들어가고, 지켜보는자의 울음소리는 멈추질 않는다.
아비를 잃은 늙은 아들은 아비의 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비를 잃은 늙은 딸은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부짖는다. 찌는 듯한 더위에 눈물과 땀이 뒤섞이고 매미의 울음과 사람의 울부짖음이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 멈추질 않는다. 그렇게 그해의 여름이 지나간다.

# 시선 둘.

늙은 아들은 손을 모아 절을 한다. 계절이 바뀌고 눈이 오기 시작했다. 매미와 사람의 울음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아비의 산소옆에는 요구르트 몇개가 놓여있다. 생전에 달달한 요구르트 마시기를 즐기던 아비의 모습을 생각한다. 이제 모습은 사라지고 아비의 흔적만이 진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아비의 흔적은 이곳에 변함없이 남아 있고, 아비를 잊지 못하는 늙은 아들은 지나간 흔적들을 더듬어 간다. 기억과 미련이 교차하는 그 순간. 늙은 아들은 다시한번 눈물을 쏟아 낸다.



# 시선 셋.

꽃과 나무는 피고짐을 되풀이 하며 생명력을 이어간다. 때맞춰 내리는 비와 함께 자라나고, 어김없이 다가오는 한파에 몸을 움츠린다. 세월은 나무의 뿌리를 마르게 하고, 나이테의 흔적을 두껍게 한다. 변함없을것 같던 고목은 소리없이 쓰러지고 메마른 땅은 그것을 흡수한다. 미처 쓰러지지 못한 밑둥은 높은 하늘에 미련을 남기고 앙상하게 말라간다.

늙은 아들은 막걸리 한사발을 들이키며 쓰러져간 고목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한다. 치매에 걸려 스스로를 희롱하던 아비의 모습을 기억한다. 아비는 넉넉한 웃음을 잃어버리고 가슴속 켠켠히 쌓아둔 울분만을 쏟아냈었다. 아비가 울었고 늙은 아들도 울었다. 늙은 아들의 시선은 초라한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가난은 대를 이었고 그 역시 끈질긴 가난의 굴레를 비켜서지 못했다.

이제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누이만 남았다. 아비를 잃은 늙은 누이는 아직도 아비를 찾아 울먹거린다. 오십을 넘긴 누이는 열두살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 변하질 않았다.  아비가 남긴 마지막 혈육이며 짊어지고 놓지 말아야 할 삶의 무게가 되었다. 

# 시선 넷.

애써 외면하던 시선이 마주친다. 늙은 아들의 이마엔 깊은 주름이 패인다. 걸걸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산골의 농부에서 배를 타는 어부까지 안해본게 없다는 늙은 아들은 자신의 손이 마르고 닳도록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처자식을 가지는 것은 사치였을 뿐이다. 혈육의 끈은 결코 끊을수 없었다. 젊었을때 주머니에 돈이 조금 생기면 어김없이 아비와 누이가 사는 이곳으로 와야만 했다.  한쪽 팔을 잃기 전까지 그런 생활은 반복되었다.

늙은 아들의 소원은 아비에게 한복을 입히는 것이었다. 어릴적 고상하게 늙어 가는 이웃들이 명절때만 되면 한복을 입고 넉넉하게 웃는 것이 부러웠다. 아비가 치매에 걸려 죽기 전까지도 그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비가 좋아하는 요구르트를 사주는 것도 힘에 버거웠다.

늙은 아들의 한숨소리에는 미련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넉넉하고 단아한 한복입은 아버지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아비는 세상을 떠났지만 미련은 떠나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우리는 몸 건강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우리를 바라보는 늙은 아들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우리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한 선량한 눈웃음을 보여주며 말했다. '잘가시게, 젊은이들' . '고맙네..정말고맙네'  돌아오는 길은 늙은 아들이 들려준 이야기에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 눈물 하나.

몇달 뒤, 늙은 아들은 갑자기 사라졌다. 그가 목숨처럼 아끼며 수십년을 보살피던 늙은 누이를 남겨두고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주말에 찾아간 우리를 반기는것은 생기없는 세간살이와 울먹이는 늙은 누이뿐이었다. 50이 넘은 나이에 누이는 고아가 되었다. 그날은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아비가 묻혀 있는 공동묘지에는 누군가 남겨두고간 국화꽃이 정성스럽게 심어져 있었다. 내리는 빗줄기에도 꽃은 쓰러지지 않았다.쏟아지는 비속에서도 아비의 무덤만큼은 고요하고 잔잔한 빗방울만 흐르고 있었다. 아비의 무덤을 보자 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지켜보던 우리들의 눈에도 빗물이 스며들었다. 비는 멈추고 다시 해가 찾아왔지만, 늙은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 눈물 둘, 기억하나.

삶에는 분명한 변곡점이 존재하는것 같다. 스스로를 지탱해 오던 희망이 무너지고 나면 모든것이 무너지곤 한다. 가난의 굴레를 물려준 아비 일지라도 늙은 아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기나긴 긴장감이 무너지고 난뒤에는 모든것이 무너지고 말았다. 늙은 아들이 소원하던 아비의 모습은 볼수 없었고 커다란 미련과 회한만 남겨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혈육인 누이마저 놓고야 말았다.

한복입은 노인이 힘에 겨운지 허리를 한번 편다.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고 넉넉해 보인다. 아마도 늙은 아들이 그토록 바랬던 모습이 이런 여유로움 일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삶의 모습은 이렇게 쉽게 설명하기 힘들만큼 묘하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 봄은 희망의 모습이어야 한다.  어딘가에서 아직도 이루지 못한 미련에 고민하고 있을 늙은 아들의 모습이 생각 난다. 그리고 그 주름진 얼굴이 생각난다. 이제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희망과 사랑을 품었으면 좋겠다.
노인은 다시 발을 내딛는다. 바라보던 나도 시선을 거두고 발을 내딛는다. 비라도 오려는듯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고 거리의 모습은 변함없이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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