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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우리시대 동화

사랑 하나, 한숨 한모금.

by G_Gatsby 2009. 8. 4.

꼬불꼬불한 아줌마 파마. 작은 체구지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
쪼글쪼글한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엔 표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담배를 사며 친해진 슈퍼마켓 아저씨가 살짝 일러준 말에 의하면, 동네에서 가장 억센 할머니란다. 화가 나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아무에게나 퍼붓는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늦은밤에도 분리수거함을 뒤지며 폐지와 빈병을 모으는 할머니였다. 할머니 옆에는 조그마한 리어커와, 덩치가 큰 딸이 있다.

너무도 까만 얼굴에 정리하지 않은 머리카락. 낡은 운동화에 발목양말을 신고 보라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할머니의 딸과 시선이 마주친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나이이거나 나보다 조금 아래일것 같다. 굳이 슈퍼마켓 아저씨의 말을 듣지 않았어도, 멍한 눈에 둔한 행동을 보면 지능이 조금 모자란 사람의 모습이다.

햇볕에 따갑게 내리쬐는 오후, 모녀를 바라보며 벤취에 앉아 마냥 멍하게 앉아 있다.

사랑 하나.

강풀의 만화를 원작을 영화로 한 "바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가 시작할 무렵 나오던 나레이션 처럼, 우리가 살던 동네에는 으례 '바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있었다. 놀림과 조롱의 대상이었고, 잔인한 아이들에게는 몇년동안 훌륭한 놀잇감이 되기도 했다. 

내가 살던 그곳에도 태생적으로 지능이 모자란 아이가 있었다. 가까운 곳의 이웃은 아니어서 가끔 지나가며 보곤 하는 풍경이었지만, 아이는 늘 여러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거나 베시시 웃는 얼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곤 했다. 

감상적이던 어린시절, 멀리서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였던 심약하고 깡마른 친구와 함께 그 아이와 놀아준 적이 있다. 우리의 친절을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침을 흘리며 우리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우리의 그런 모습은 좋은 놀림감을 잃어버린 동네 아이들에게는 무척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며칠을 그렇게 놀고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시절에는 으례 골목대장 같은 녀석이 있었고, 깡말랐지만 키가 무척이나 컸던 한 녀석이 시비를 걸었다.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녀석이 던진 몇마디의 말이 나를 무척 화나게 했던것 같다.

옆에 있던 심약하고 겁많은 친구는 도망을 가고, 오기와 고집으로 똘똘 뭉쳐있던 나는 그 녀석에게 대들었다. 신나게 녀석을 패주고, 동네 아이들을 물리치고 불쌍한 아이를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물론 생각만 그러했다.

옷이 찢어지고 코피가 터지고도 한참을 두들겨 맞았다. 녀석은 때린곳만 집요하게 계속 때렸다. 그래서 더 아팠다. 분함을 참지 못하고 엉엉 소리를 내면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맞은것에 대한 분함 보다는 홀로 남겨진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던 분함이 더 컸던것 같다. 어머니의 집요한 추궁에도 아무말도 하지 않고 며칠을 끙끙 알았다. 아직도 한쪽 볼에 손톱으로 활퀸 그때의 자국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것을 보면 꽤 많이 맞았던것 같다.

한숨 한모금.

꽤 시간이 흘렀고, 아이의 모습도 점차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올라가게 되었고,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목소리는 굵어졌고, 키가 부쩍 자랐다. 친구에게서 비틀즈의 테이프를 빌려오는길에 다시 어릴적 그 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깔끔하고 예쁘장한 외모.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와는 달리 화장을 곱게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이제 불쑥 커져버린 아이의 손을 쥐고는 무언가를 타이르고 있었다. 덩치는 커졌지만 아이는 여전히 멍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스포츠로 짧게 깍은 머리를 아이의 어머니는 쓰다듬고 있었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방긋 웃음을 지었고, 아이의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며 함께 웃었다. 나는 머슥한 기분에 그저 목례만 했다. 어머니는 아이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고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등을 돌려 타고온 자동차에 올라탔다. 아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방긋방긋 웃어댔다. 아이의 어머니는 긴 한숨과 함께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나이든 할머니가 소리를 치며 아이의 손을 잡아 끌었고, 아이는 이내 골목안으로 사라졌다.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아이의 어머니를 태운 차가 시동을 걸었다.

차가 사라진 그곳에는 아직도 아이와 어머니가 나눈 사랑의 체온이 남아있는듯 했다. 골목으로 사라진 아이의 뒷모습과, 차를 타고 사라진 어머니의 뒷모습에는 긴 한숨이 남아 있었다.


동네 공원에 있는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할머니가 잠시 벤취에 앉아서 가쁜 숨을 몰아 쉰다. 할머니의 옆에 덩치큰 딸이 나란히 앉는다. 할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름진 얼굴의 땀을 닦는다. 덩치큰 딸은 옆에서 쉼없이 재잘 거린다. 할머니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멍하니 쓰레기 더미만 쳐다 본다. 덩치큰 딸은 산만하게 이리저리 다리를 흔들어 댄다. 그러다가 벤취뒤에서 찌그러진 캔을 발견하고는 주워서 할머니에게 건네준다. 그것을 본 할머니의 얼굴에 알듯말듯한 미소가 번진다. 할머니의 미소를 본 딸은 크게 소리를 내어 웃는다. 할머니는 앙상한 팔을 뻗어서 딸의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다.

오랜 시간 분당에서 살다가 이곳에 온지 반년이 조금 넘었다. 건물과 건물이 만들어내는 답답함에서 벗어나, 사람의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 오면서 생각이 참 많아졌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이곳으로 막연하게 오게되었다. 낯선 곳이지만 전혀 낯설지 않다.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삶의 모습은 과거와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고, 어제와 내일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살아 움직이는 발걸음속에 모든것이 담겨있는것 같다. 이번 겨울에는 조금 더 한적한 곳으로 떠나야 할것 같다.

아련한 기억속에는 늘 사랑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때로는 아픈 사랑이 있고, 잊혀져 버린 사랑도 있으며, 기억해야할 사랑이 있다. 가끔은 아픈 사랑속에 담겨진 긴 한숨이 있기도 하다. 산다는 것은 늘 이렇게 사랑을 품는 것 같다. 가슴속 깊이 숨을 들이쉬더라도, 내쉴땐 긴 한숨이 되는 것도 있다. 그래도 그것이 사랑임은 변하지 않는다. 내리쬐던 햇살이 뜨겁던날, 사랑 하나와 긴 한숨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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