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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우리시대 동화

은밀한 유행, 악몽으로 막을 내리다.

by G_Gatsby 2008. 6. 16.

" 은밀한 유행 따라잡기 "

유행 이라는것이 좀 묘해서 평소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무작정 따라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한참 뒤에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는 경우도 있다. 몇 해 전쯤 속옷을 입지 않는 것이 유행처럼 스쳐간 적이 있다. 잠을 잘때 속옷을 입지 않고 자는 사람은 제법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속옷을 입지 않고 겉옷만으로 거리를 활보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취향에 맞지도 않은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졌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다만 한동안 속옷을 입지 않고 거리를 활보 했고, 나름데로 자유로운 감각과 느낌을 즐겼던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변태적 기질이나 노출증 환자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결단코 오해다.

" 자만심, 벼는 덜익을수록 고개를 든다"

그 시기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름데로 업무 분야에 자만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격적인 문제라고 말할수 있겠지만 한참 일에 대한 열정과 재미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고 싶다. 당시 선배 한분이 직장인을 상대로 하는 야간 대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마침 내가 하는 업종에 관련된 일이었고, 나이차이가 제법 있었지만 가깝게 지내던 선배 였다. 선배는 우리 회사에 기업실무에 대한 특강을 부탁했다. 일주일에 1시간씩 4주에 걸친 비교적 짧은 강의 였는데, 대부분 진로와 기업의 현재 동향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었다. 다들 강의 시간도 애매했고, 별다른 관심도 없는것 같아서 건방지게 내가 냉큼 강의를 맡겠노라고 신청했다. 조금 귀찮아 하던 상사는 쉽게 승낙을 해주었다.

실무경력이 3년도 안된 조무래기 전문가에 불과했지만, 나름데로 자신감이 있었던것 같다. 거창한 강의도 아니라 한시간 짜리 짧은 특강 이었지만 웬지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어릴적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을 애써 기억해 내기도 했다. 프리젠테이션을 잘한다는 칭찬도 받았던 시기라서 그런지 우쭐한 기분도 있었다. 강의를 하기로 한 당일, 퇴근한 후에 입었던 정장을 벗고 새로운 와이셔츠와 정장으로 갈아 입는 성의 까지 보였다. 마음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출발할때 느껴지던 끝없는 자만심. 나는 몰랐다. 그 휘파람이 비극의 서막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는 것을.

" 행복했던 한시간의 기억 "

일찍 도착해서 선배와 이야기를 나눈후 간단한 주의사항을 듣고 농담을 했다. 비교적 소심한 나는 회의를 할때는 언제나 버릇처럼 화장실을 간다. 비록 신체가 배설을 원하지 않더라도 꼭 화장실을 가야 한다. 그것은 장시간 집중을 하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다. 그날도 난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본후 나름데로 머리에 빗질까지 하며 신중을 기했다.

학생은 나이가 조금 있는 사람부터 해서 20대 중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학과 특성상 여자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강의실에 들어가서 소개를 받고 처음 내눈에 펼쳐진 40여명의 만학도들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위대한 투사들이자, 이 시대를 이끌어갈 산업 역꾼 이었다. 이런 그들에게 난 한줌의 지식이라도 나눠 주리라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

강의가 시작되고 간단한 소개를 마친후, 기업의 환경과 전망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칠판에 분필로 판서를 하고 동그라미를 그려 가며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애써 여유를 보이려고 삼차원적 유머를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반응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처음에는 열심히 나를 보며 듣는것 같았는데, 시간이 조금 지날수록 많은 사람들이 책만 쳐다보고 나를 잘 보질 않았다. 목소리를 조금 높이며 웃음을 유도 해도 킥킥 웃기만 할뿐 반응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한시간이 끝났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내가 또 언제 대학 강단에 서서 사람들을 가르킬수 있단 말인가. 강의를 마치고 교수실에 있는 선배를 만나러 가는 나의 만족감은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고 난 뒤에 느끼는 포만감 그 자체였다.

" 악몽을 꾸다 "

선배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따뜻한 커피를 건네 주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서 막연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던 나는, 커피를 마시며 책장가득 꼽혀 있는 책들을 구경하며 우쭐해진 기분을 마음껏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해즐럿향 커피가 그토록 달콤할 수가 없었다. 다음주에는 어떤것을 해야 할지를 선배에게 물어 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웃음지으며 물어 보는 내 모습을 보던 선배의 시선이 잠시 아래로 내려 가는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선배가 외친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
"야~ 바지 지퍼는 왜 열고 다녀? 그리고 속옷도 안입고 다니냐! "

난 그날 강의를 받았던 학생들이 모두 다 강의실을 빠져 나간것을 확인하고 도망치듯 학교를 나왔다. 그나마 강의를 할때 쭈그린 자세가 없었다는 사실에 안도 했다. 내 시선을 애써 피하던 사람들의 당황스러움을 이해할수 있었다.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그날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꿈속에서 나는 만원 관중이 있는 야구장에 스트리퍼가 되어 그라운드를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다음날 회사에 다음 강의는 나갈수 없다고 말했다. 계속 걸려오는 선배의 전화는 고의적으로 받질 않았다. 속옷은 꼭 챙겨 입기 시작했고, 화장실을 들락거릴때는 몇번이고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그날 이후로는 그 대학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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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상 "

며칠전 회식 자리에서 우연찮게 선배를 만났다. 같이 회식을 한것은 아니고 우연찮게 같은 곳에서 서로 다른 회식을 하게 되었다. 한동안 잊었던 기억이 다시 되살아 났다. 하지만 선배는 그 일에 대해서 기억을 하고 있지 않은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한순간의 실수로 나의 모범적인 태도와 예의바른 행동들이 변태나 노출증 환자로 인식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한동안 못나눴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법 흘러 버린 시간만큼 선배의 얼굴엔 학자 특유의 총명함이 느껴졌다. 소주 몇잔을 연거푸 받은 다음 내 자리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을때 선배는 나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아직도 속옷 안입고 다니냐? 좀 입고 다녀, 그때 우리 난리 났었어~" 
제길, 하필이면 그날이 그때 졸업생들 모임이었다니.

가끔 살다보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억울한 상황을 맞이 하게 된다. 진실을 말하고 싶어도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낄때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어느 곳에서는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은 이런 우울한 회상 때문에 자신이 싫어질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