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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우리시대 동화

친구, 가리워진길을 보다.

by G_Gatsby 2008. 7. 14.


얼마전 내 친구의 글을 올린적이 있다.
우리는 늘 빛을 쫓아 가면서 등뒤에 그려있는 그림자의 존재를 잊고 산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 감추어진 아픈 현실을 애써 외면한다.
글을 올리고 다시 그 친구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할까 한다.

[관련글]  30대, 감추어진 친구의 그림자

타박 타박 걸어가는 인생 길.

뒤를 돌아보면 아득히 걸어온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좁고 험한 길을 힘들게 걸어와 모퉁이 작은 바위에 앉아 잠시 숨을 골라 본다. 가끔은 안개만 자욱하여 끝은 보이지도 않는 가리워진 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핸드폰도 없이 살아가는 친구에게 내가 먼저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던 중 거의 한달여 만에 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 약속했던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목소리로 녀석을 반겨 주었다.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정말 반가웠다.

   우리는 잃어버린 물건을 우연히 찾게 되었을 때, 반가움과 함께 그 물건에 새겨 있는 진한 추억을 생각해 내곤 한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들여다 볼 때 느끼는 반가움과 아련한 기억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노릇하게 고기가 익는다. 마주 앉아 소주잔을 주고 받는 시간이 정겹다. 옆 테이블에 앉은 아가씨들처럼 재잘거리는 흥겨움은 없지만, 투박하게 나누는 이야기가 포근하다. 조금은 낯설었던 얼굴이 예전에 느꼈던 익숙한 인상으로 변해 간다. 사람이 참 그리웠다는 녀석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무미건조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녀석은 또다시 재미있게 듣는다. 사람이 외롭다는 것은 내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말을 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녀석의 얼굴은 취기로 다시 달아 오른다. 호탕하게 웃는 모습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다. 녀석의 이마위에 그려진 주름이 자꾸 신경 쓰인다.
 
   누구나 한번쯤은 인생을 깨끗한 백지 위에서 다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볼 것이다. 세상을 조금 알 것 같으면 이미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하고 이마에 주름살은 깊게 파인다. 그래서 인생은 가슴가득 후회만 쌓으며 살다 가는지도 모른다.

“ 도움이 필요한게 아니라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거지...”

   가슴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마치 술기운을 빌어서 혼잣말을 하는 것 같다. 가끔 먼 곳을 향하는 녀석의 시선에 고단함과 외로움이 묻어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사랑했던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다고 한다. 자신의 삶에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하단다. 그래서 떠나가는 자신을 용서하지 말고 잊어 달라고 했단다. 서른을 넘겨, 애틋한 사랑의 노래를 멈춰야 했단다. 떠나가는 사람을 잊기 위해서 자신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단다. 어느새 녀석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진다.

“ 나...사는게 참 추하지? 씩씩하게 살아야 하는데...”

   마음속에 주름을 안고 살아가는 사내의 눈물을 보았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황급히 담배를 찾아 입에 문다. 급하게 내뿜는 연기속에 작은 떨림이 느껴진다. 연기 너머엔 비바람 몰아치는 가리워진길을 홀로 걸어가는 녀석의 눈물이 보인다.

   자리를 뜰 무렵, 계산서를 두고 또 실랑이를 벌인다. 녀석의 완력에 나 또한 심하게 저항을 한다. 이번엔 내가 이겼다. 녀석은 그것조차 미안한지 고개를 돌린다.

   오랜만에 녀석과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가 도와줄 것이 없는지 물어 보았다. 이렇게 만나서 수다 떠는게 큰 도움이 된다는 대답이 온다. 나는 집요하게 현실주의자가 되어 다시 물었다. 녀석의 대답은 여전히 공허하다. 다음에 고향에 있는 녀석의 아버지 산소를 같이 가기로 했다. 아마도 아버지는 나를 기억할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녀석의 아버지를 기억 속에서 더듬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 진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네거리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섞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잠시 휴식을 멈추고 또 다시 버거운 길을 떠나야 한다. 지켜주는 이도, 동행하는 이도 없는 막막한 그 길을 말이다.

마음을 나누는게 가장 큰 기쁨이라는 녀석의 말을 가슴에 새겨 넣었다.
녀석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고된 삶의 체취가 아직도 내 주위를 맴돈다. 안개 자욱한 길을 홀로 걸어 가는 녀석의 모습을 생각하며 다짐해 본다. 같이 걸어가진 못하지만 지켜봐 주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가리워진 길을 외롭게 홀로 걸어가게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녀석이 사라진 곳에 가로등이 환하게 켜진다. 내 마음속에도 환한 빛이 함께 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