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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12시 5분전

노인과 흰우유

by G_Gatsby 2010. 3. 15.

겨울비인지 봄비인지 알지 못하는 비가 내립니다.

꽃샘 추위라고는 하지만 꽤 매서운 바람이 붑니다. 비가 오는 거리는 물에 젖은 발걸음으로 분주해 집니다. 같은 걸음으로 길을 걷지만, 매번 걸음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을 땐 걸음이 가볍고 기분이 좋지 못할 땐 걸음이 무겁습니다. 

 

# 1

오래된 슈퍼마켓앞에 그늘진 차양막이 있습니다.

비를 피해 그곳에 자리를 잡은 한 노인이 무언가를 먹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계란빵 입니다. 노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작은 빵입니다. 백발의 노인은 비오는 거리를 바라보며 오물거리고 빵을 먹습니다.

 

이가 없는 노인이 틀니도 없이 무언가를 먹는 모습을 보셨겠지요.
그저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빵도 오래오래 씹어 넘겨야 합니다. 빵을 씹기 위한 노인의 얼굴이 분주합니다. 입가에 잡힌 주름도, 눈가에 잡힌 주름도, 이마에 잡힌 주름도 함께 움직입니다. 낮선 사람이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문득 틀니를 받고 기뻐하던 오래전 할아버지의 생각이 났습니다.

[사는 이야기/우리시대 동화] - 부치지 못한 마지막 소포.

작고 낡은 슈퍼마켓으로 들어가 1,500원 짜리 흰우유를 하나 샀습니다.
가게를 지키는 사람도 다리가 불편한 노인입니다. 비오는 거리를 바라보며 계란빵을 먹고 있는 노인에게 우유를 드렸습니다. 노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허겁지겁 우유를 마십니다. 무언가를 씹기에도 고단해 보이는 노인의 시선은 비오는 거리의 풍경도 낯선이가 건네는 우유에도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는 작은 포만감에만 집중을 합니다.



 

봄비가 내리는 3월의 풍경입니다.

백발의 노인은 비에 젖은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고, 검은 양복 입은 낯선 남자는 노인이 앉아 있는 작은 슈퍼의 풍경을 바라봅니다.

 

# 2

 

무상급식에 대해서 말이 참 많습니다.

사회 복지에 대해서도 말이 많구요. 정치권에서는 표를 얻기 위해서 이리 저리 돌려 대며 말을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사회주의 국가냐 라는 말도 나옵니다. 어이없는 일이지요.

 

정치는 사회 구성원의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짊어지는 의무 만큼 적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죠. 국가의 재정지출에 대해서는 더 큰소리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는 문제가 많습니다. 소리를 내면 좌파나 빨갱이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의 정치는 참으로 무겁고 버겁습니다.

사회 귀족의 신분 유지를 위한 공간에서 나아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 귀족이 되기 위한 변절자들이 판을 칩니다. 본질은 사라지고 허울만 커지는 것이죠.

 

지금껏 우리 사회는,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만들어 왔습니다.잘살아보자는 국가적 구호 아래 사회 구성원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쉬지 않고 달려온 시간이었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눈부신 발전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루어놓은 것들을 사회 구성원에게 분배하는 문제에는 인색 합니다.
나라의 경제력은 커지고 재벌과 부자들의 배는 갈수록 불러가지만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갈수록 궁핍해 집니다. 커지는 국력과는 정확히 반비례 합니다. ‘사회귀족들은 자유경쟁과 애국심을 강조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배가 더 불러지니까요. 출발점이 다른 달리기 시합이 올바른 경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진보는 무조건 좌파가 되고, 전교조가 빨갱이가 되며, 떴떳해야 할 노동조합이 폭력집단이 되어 버립니다. ‘노동의 가치는 사라지고 스스로 노동자임을 알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늘어갑니다. 언론은 연일 애국심을 강조하며 마지막 남은 눈물 한방울까지 쥐어짭니다. 권리는 사라지고 의무와 규제는 늘어갑니다. 그래야 소수의 귀족이 다수의 사람을 지배할수 있으니까요.

 

출산율이 떨어지고 빈부의 격차가 심해집니다.

남들보다 공부를 더 해야 잘 살수 있다며 경쟁을 부추깁니다. 사학 재단의 돈벌이는 갈수록 커지고 계층의 갈등은 더 깊어갑니다. 모두에게 버겁고 힘겹습니다. 무상급식, 무상교육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멀쩡한 강을 삽으로 팔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을 심어줘야 합니다. 핸드폰을 외국에 많이 수출하는 나라가 선진국이 아니라 먹고 살 걱정 없는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입니다



 

오랜 시간 빵을 먹던 노인이 부스스 일어 섭니다.

털이 달린 검은색 신발이 물에 젖어 반짝 입니다
노인의 시선이 가야 할 길에 머뭅니다. 어쩌면 다음 끼니를 걱정하며 바라보는 지도 모릅니다.

 

비가 부슬한 거리를 노인은 우산도 없이 걷습니다.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이 쏟아 집니다.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무리에 시선조차 던지지 않고 허리 굽은 백발의 노인은 길을 걷습니다. 노인이 먹다가 흘린 하얀 우유가 비와 함께 섞입니다. 하얀 비를 맞으며 노인의 뒤를 따라 조용히 걸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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