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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길을 걷다

책이 익어 가는 풍경

by G_Gatsby 2010. 6. 10.

저녁 무렵이 되면 사거리 큰 길가에는 과일 파는 트럭 두 대가 어김없이 서 있다.
모퉁이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나뉘어 서 있는데 영업에 부담을 느끼는지 서로의 시선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있다. 이쪽에서 걸어 오면 과일 파는 트럭이 하나만 보이고 저쪽에서 걸어와도 마찬가지다. 불법 노점이 분명한 것이지만 휴일을 빼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보는 풍경이라서 꽤 익숙하다.

한쪽 트럭에는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아저씨가 장사를 하고, 또 다른 트럭에서는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가 장사를 한다. 투박한 아저씨의 영업 방법은 간단하다. 가격을 물어보고 사는 손님에게 아무말 없이 덤을 몇개 더 얹어 준다. 더 준다는 말도 없이 습관적으로 몇개를 더 넣는다.

등산복 아주머니의 영업방법은 조금 다르다.
지하철 출구로 나오는 손님에게 과일을 권한다. 그러다가 한 봉지를 사려는 손님이 있으면 두봉지에 얼마라며 좀 더 싼 가격을 내놓는다. 그래서 결국 두개를 판다. 아저씨의 트럭에는 아주머니의 손님이 많고, 아주머니의 트럭에는 아저씨 손님이 많다. 

서로 다른 풍경이긴 하지만 비슷한 풍경도 있다.
손님이 뜸해지는 밤이 오면 트럭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모습이다.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책을 보는 모습은 똑같다. 아저씨는 자그마한 성경책을 꺼내서 읽고, 아주머니는 커다란 소설책을 꺼내어 본다. 책을 보다가 손님이 오면 반갑게 나가 과일을 팔곤 한다.



비가 올듯 말듯 흐린 어느 저녁날 아저씨의 트럭 앞을 지나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 때문인지 길을 걷는 손님도 뜸해지고 있었고, 아저씨는 어김없이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성경책을 보고 있었다. 성경책을 보는 아저씨의 모습은 정말 진지했다. 고단한 일상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 읽는 것인지, 다음 세상의 희망을 꿈꾸며 읽는 것인지는 알수 없다. 무표정한 표정이었지만 눈가에 서려 있는 총기를 느낄수 있었다.

서점에 들러 책을 몇권 샀다. 
서점의 가판대에는 돈과 재테크에 관한 책들이 즐비했고, 남자와 여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잡지들이 많았다. 곱상한 아주머니가 부동산 투자에 관한 책을 골라서 계산을 한다. 말끔한 청년이 경제잡지와 만화책을 골라서 계산을 한다. 책들은 화려한 문구와 어휘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책을 사고 나가는 사람들은 어쩌면 돈을 많이 벌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아저씨의 트럭앞을 지나간다.
성경책을 읽던 아저씨는 누군가와 함께 비가 흐르지 않는 상점 처마밑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다. 트럭을 바라보는 아저씨의 담배 연기가 독하고 심란스럽다. 옆을 지나가는데 아저씨가 내뱉는 말소리가 들린다. 

"우리같은 트럭커가 갈곳이 뻔한데..."

트럭커가 무얼까 잠시 생각해 본다. 트럭과 리어커의 합성어일까..아니면 트럭으로 노점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일까. 생각을 해봐도 답을 찾을순 없다. 아저씨의 트럭으로 다시 돌아가 참외를 골라 본다. 담배를 태우던 아저씨가 재빨리 뛰어와서 옆에 선다.

까만색 양복에 노란색 참외봉지를 양쪽에 들고 터벅터벅 걷는다. 아저씨가 덤으로 몇개를 더 주는 바람에 제법 무겁다.

책 읽는 트럭커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넣어 본다.
누군가는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으려 책을 읽고, 누군가는 미래의 희망을 꿈꾸며 책을 읽는다. 또 누군가는 현실의 고달픔을 이겨내기 위해서 책을 읽고, 또 누군가는 갈 곳없는 세상에 홀로 남아 책을 읽는다. 어떤 이유에서 책을 읽더라도 우리 역시 갈 곳은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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