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내리는 장마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올해 장마는 끝났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거세게 몰아치는 폭우가 아닌 열기를 식혀주는 그런 비를 원했는데 말이죠. 8월에는 열대야가 9월에는 태풍이 예고된다고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기예보'입니다. 십수년간 병역을 회피한 어느정치인이 몰랐다고 이야기 하는 것만큼 믿기엔 꺼림직합니다.
요즘 더운 밤을 보내기 위해서 창문을 모두 열고 헐벗은 자세로 잠이 듭니다. 그래서인지 외부에서 들리는 작은 소음도 크게 느껴지네요. 밤늦게 아랫집 총각이 탐닉하는 '에로 있는 영화'의 헐떡이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막걸리 한사발에 흥얼거리는 취객의 '비내리는 호남선'이 들려올때도 있습니다.
# 1
얼마전인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서 밤늦게 사랑을 고백하는 청년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고요한 새벽에 울려퍼지는 술취한 청년의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2층 창가에 대고 사랑을 갈구하는 청년의 목소리가 애잔하게 들리더군요. 그래도 2층집 처자는 끝내 창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떨구며 돌아서는 청년이 열리지 않는 창문을 향해 던진 마지막 말은 '기다릴께' 였습니다. 그 소리가 들리자 마자 2층의 불은 모두 꺼졌습니다. 가로등에 의지해 뒤돌아서서 걷는 청년의 뒷모습을 쳐다 봅니다. 축처진 어깨는 몇걸음을 걸을때마다 뒤돌아 서서 처자의 창문을 바라 봅니다. 미련인지 집착인지 알수는 없습니다.
# 2
몇해전 지방으로 장기출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육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그곳의 많은 분들과 친해지게 되었죠. 지방 인심이 전해주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감동이었습니다. 그중에 저를 참 좋아해 주시던 분이 계셨습니다.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나이가 50정도 되신 분인데 세상 모두에게 친절한 분이였죠. 짧은 시간이었지만 웃음이 주는 여유로움과 철학을 배울수 있었습니다.
돌아오기 전에 회식을 했습니다. 모두가 거하게 술을 한잔씩 했죠. 그리고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서 노래방을 갔습니다. 물론 음치와 몸치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저는 조용히 감상만 했습니다. 80년대 댄스곡이 흐르고 알수없는 트로트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모두가 술과 흥에 겨워 마지막 이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자기 순번을 받은 그 아저씨가 마이크를 잡게 되었습니다. 노래방 기기에서는 조용한 발라드곡이 흘러나오고 있었죠.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일부는 화장실로 도피를 하고, 일부는 오지 않는 전화기를 부여잡고 밖으로 나갑니다. 아저씨는 조용하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스치는 바람결에 사랑노래 들려요, 내곁에서 떠나버렸던~~" 50넘은 아저씨가 부르기에는 노래가 참 서정적이었습니다.
노래가 끝나갈 무렵 아저씨가 울먹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진지한 아저씨의 표정에서 느낄수 있었죠. '내게 남은 사랑을 다 주고 싶다'는 가사가 아저씨를 울컥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다시 알수 없는 트로트 음악과 말도 안되는 팝송이 이어졌습니다. 아저씨는 그후로 노래를 더이상 부르지 않았죠. 그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보면서 웃고만 있었습니다.
이후에 아저씨가 혼자 사는 독신남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어딘가에 보수공사 조차 할수 없는 하자가 있다는 둥, 눈이 너무 높아서 못했다는 둥 말이 있었지만 아저씨는 못한게 아니라 안한거라고 끝까지 우겼나 봅니다. 서른살에 찾아온 열병같은 사랑의 아픔을 겪은후, 관념적인 사랑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나 봅니다. 그리고 아직도 지나간 사랑에 대한 추억과 함께 다가올 뜨거운 사랑을 기다린다고 있습니다.
청년이 떠나간 거리뒤에 새로운 하루가 밝아옴이 느껴집니다.
조금씩 세상이 밝아지고 부지런한 노인들의 아침 산보가 시작되는게 보입니다. 청년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를 사랑을 기다리며 아침을 맞이하는지도 모릅니다. 청년이 떠난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아저씨가 부르던 노래 가사가 생각이 납니다. 내게 남은 사랑을 모두 주고 싶다며 울먹이던 그 모습도 함께 떠오릅니다. 청년이 던진 마지막 말과 함께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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