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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우리시대 동화

서민으로 산다는 것 - 40대 가장의 이야기

by G_Gatsby 2008.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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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40대 가장의 이야기.

맞벌이 하시는 부모님 덕분에 어릴때 부터 독립심을 키워야 했다. 6살 어린 동생과 대학에 입학 할때 까지 한방을 써야 했다. 조그마한 식당을 하셨던 부모님은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저녁 10시가 되어야 돌아왔다. 그래도 장사가 잘 되는 날에는 양손가득 맛난것을 사가지고 오셨다. 일찍 잠든 동생은 부모님이 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재롱을 떨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재잘거리며 먹을 것을 먹는 우리 형제들이 마냥 이뻤든지, 아버지의 입가엔 연신 미소가 흘렀다. 고향을 떠나온 도시의 외로움 속에서도 부모님은 늘 희망을 이야기 했다.

학원과 과외가 성행하던 시절, 넉넉하지 못했던 부모님은 한숨을 자주 쉬셨다. 남들이 과외를 받을 때 나는 6살 어린 동생의 저녁을 챙겨 주면서 혼자 공부를 했다. 남들보다 뒤쳐지는건 정말 싫었다. 최고는 아니지만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합격통지서를 받아 들고 부모님이 일하던 식당으로 달려갈 때 내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보시는 아버지의 두손에 합격통지서를 건네 드렸다. 나는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 열심히 살아서 행복했던 시절 "

대학생활은 쉽지 않았다. 학비는 일년 내내 나와 부모님을 힘들게 했다. 그래서 나는 자원입대를 했다. 군대에서 받은 월급을 모아서 전역할때 부모님 양말을 사드렸다. 어른이 되어 버린 아들이 제대로 된 방도 없이 어떡하냐고 어머니는 연신 미안해 하셨다. 그러면서  학비 걱정은 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나는 언릉 학업을 마치고 좋은데 취업해서 동생은 내가 공부를 시키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자랑스러웠는지 약주를 한잔 하셨고, 주름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 하셨다.

거리에 가득 사람들의 물결이 넘쳤다. 군부 독재권력에 대항하는 거센 시대의 물결에 나도 피해가지 못했다. 부모님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뛰어나가 민주주의를 외쳤다. 당시에는 보이는 모든것들이 추악했다. 정의로운 사회만이 나와 내 자식들을 잘 살게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치고 외치고 또 외쳤다. 그리고 그들은 물러났다. 이제 살만한 세상이 되었다고 친구들과 엉엉 울었다.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고 말이다.

취업을 하면서 적금을 넣었다. 월급이 많진 않았지만 쪼개어 쓰면 생활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부모님은 식당을 조금 넓혔고 단골손님 덕분에 동생 공부도 큰 걱정 없게 되었다. 은행에서 일하던 아내를 만났고 결혼을 했다. 나이 서른에 얻은 첫 아들을 보면 일 할 맛이 났다. 크진 않지만 작은 집도 하나 장만 했다. 물론 은행에 대출을 냈지만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가져 보는 내집이었다. 이렇게 오손도손 살며 늙어 가는 것이 행복인가 싶었다.

" 희망을 놓기 싫었던 시절 "

직장을 그만 두는 날 나는 아버지를 찾았다. IMF는 얼마 안되는 퇴직금과 함께 한참 일할 나이인 나를 명예퇴직 시켰다. 나의 능력부족이라고 탓해봤지만 억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손님이 갈수록 준다며 한숨쉬시던 아버지는 서른넘은 자식의 어깨를 다둑 거리며,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다고 말하셨다. 나는 그날 세시간을 넘게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며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아내는 씩씩하게 부업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취업이 되질 않았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갔고 나와 아내는 지쳐갔다. 퇴지금이 바닥나기 시작할 무렵, 어렵게 얻은 내 집을 팔고 전세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는 힘들어 하는 장남이 안되 보였는지 연신 못도와줘서 미안하다는 말씀만 하셨다. 철없는 아이는 친구들과 헤어지는게 싫었는지 이삿짐 트럭에 타지 않고 소리내어 울었다. 아내는 동네 창피 하다며 아들의 엉덩이를 연신 때리기만 했다.

회사 동료가 사놓은 땅값이 또 올랐다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땅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며 10억을 준다고 했다. 동료는 조금 더 버티면 15억은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회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아내의 한숨소리만 들렸다. 아이들 키우는데 돈은 많이 들어가는데 수입이 적다고 말했다. 그날 난 부모님이 일하시는 식당에 찾아 가서 혹시 몰래 사놓은 땅이 있냐고 물었다. 남들은 땅도 물려 받고 집도 물려 받아서 쉽게 돈을 버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냐고 물었다. 환갑을 넘으신 아버지가 미안해 하며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가진것 없는 집안에 태어나서 고생만 한다고 어머니도 함께 우셨다.

매월 10일이 월급날이다. 월급을 타도 나는 집에 빈손으로 들어간다. 아내는 둘째 아이 학원비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또 한숨을 쉰다. 곧 대학에 들어갈 큰아이의 등록금도 문제다. 맞벌이 하는 아내의 주름살이 부쩍 늘었다.
친구들과 모임도 잘 가질 않는다. 못사는게 창피하단다. 학원비 벌어보겠다고 오늘도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어릴적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홀로 저녁을 먹는다.

" 희망을 잃어 버린 시간들 "

그래, 살기 참 힘들다. 갈수록 힘들다. 물려 받은 재산이 없어도 열심히 살았던 부모님은 희망이라는게 있었다. 힘들게 맞벌이 하면서도 집안에 들어오면 웃음이라는게 있었다. 하루를 열심히 살았기에 피곤했지만 먹고 살만 했다.

세상이 나아졌다고 이야기 한다, 내가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는데 난 왜 사는게 힘들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열심히 일하고 맞벌이를 해도 나아지는것이 없다. 아이들은 자기방에서 나오질 않고 집안엔 웃음도 사라졌다. 시체말로 물려받은 재산이 있으면 살기 쉽다. 하지만 나처럼 맨주먹인 사람은 살기가 너무 어렵다. 부모를 잘 만나야 잘 사는 세상이 되었나 보다.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미안함에 눈물이 나온다. 이 아이들이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평생을 살겠는가.

어린 나에게 착하고 바르게 살라고 하셨던 아버지, 남한테 싫은 소리 한번 못하시고 오랜 노동에 허리가 휘어 버린 우리 아버지. 하지만 그런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지금 아버지를 원망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원망을 내 아들에게 물려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진다.

민주주의를 외치고, 사회 정의를 외치며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거리로 나가 고함을 지르던 때가 생각난다. 그 순수한 함성이 기대했던 사회는 이런게 아니었다. 군사 권력은 경제 권력으로 옮겨 갔고 그 힘은 더 커졌다. 갈수록 서민들은 살기가 힘들어 졌다. 정권이 바뀌어도 더 힘들어 진다. 열심히 살아도 가난에서 벗어나오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 서민들의 삶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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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우리의 자화상이다. 정치인들은 모두 서민을 위한다고 말들 한다.지금 서민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희망을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