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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12시 5분전

애들아, 나 아니거든...

by G_Gatsby 2010. 1. 7.

폭설과 추위로 마실 다니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도 걷지 않은 소복히 쌓인 눈길에 하나둘씩 발자국을 만들면서 영화처럼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여기저기 오래된 퇴비처럼 검게 굳어 버린 눈을 삽으로 깨는 소리와 미끄러질까봐 어정쩡 하게 엉덩이에 힘을 주고 걷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공원을 걷기로 합니다.
출퇴근 시간에는 전쟁같은 풍경이지만, 오후에는 그래도 한가로워 보입니다.

# 1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세상이 온통 얼어 붙은 느낌입니다.
구석자리에 앉아서 표정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 봅니다. 서로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표정없는 얼굴을 짓고 있습니다. 이제 익숙해질만도 하지만 아직도 이런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너댓살 먹은 남자 아이가 커트머리를 한 여학생의 손을 잡고 차에 오릅니다. 나이차이가 꽤 나는데 남매지간 인것 같습니다. 아이는 900원짜리 바나나맛 우유향을 풍기며 내 옆에 조그마한 엉덩이를 붙입니다. 아이의 눈은 언제나 맑고 투명합니다. 두툼한 옷을 입은 아이의 모습이 참 귀엽습니다. 서늘한 풍경이 갑자기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전철이 출발하자 마자 아이가 누나를 바라보며 볼멘소리를 냅니다.

"배아파, 똥마려워"
"금방 가니까 참아."

아이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집니다. 아이의 애틋한 몸부림이 옆자리까지 전해 옵니다. 아이의 표정이 금새 울음을 터뜨릴것 같습니다. 마음속으로 아이의 무탈을 기원하며 캔디 버전으로 노래까지 불러 줍니다.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울어...

어디선가 쏘시지와 계란을 가득 넣어 이틀정도 숙성시킨 김밥냄새가 나는것 같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으며 아니길 기원해 봅니다. 차마 힘들어 하는 아이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는 없습니다. 눈을 감고 서서히 풍겨나는 냄새에 취해갑니다. 스팀의 더운열기를 타고 아래에서 부터 위로 냄새가 올라옵니다.


" 쌌어? "

전철이 멈추고 누나는 아이를 데리고 바삐 자리를 뜹니다.
남매간의 대화가 없었지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된것을 느꼈나 봅니다. 뒤뚱거리며 누나의 손을 잡고 불편한 걸음을 걷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종종 걸음을 치는 남매의 뒷모습이 갑자기 슬퍼보입니다. 마음속으로 아이의 안녕을 기원해 봅니다. 부디..흘리지 말고 힘내라...

#2

어릴적 유난히 차멀미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먼곳으로 이동을 할때에는 어머니께서 항상 까만색 비닐종이를 준비하곤 하셨습니다. 어디서 그랬는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꽤 여러번 흔들리는 버스안에서 까만색 비닐종이에 머리를 넣고 눈물을 흘린 기억이 선명합니다. 뽀얗게 창가에 김이 서린 추운날, 까만 봉지에 머리를 박고 입을 벌리고 7초쯤 지나면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열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등을 쓰다듬어 주시던 어머니의 근심어린 얼굴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다음역에서 노인 몇분과 두터운 잠바를 걸친 여학생 무리가 차에 오릅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이 추운 겨울에도 책가방을 메고 공부를 합니다. 참 슬픈 현실입니다.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중 한명이 킁킁거리고 냄새를 맡습니다. 맞은편 노인이 경상도 말투로 옆자리의 할머니에게 물어 봅니다.

"뭔 냄새 안나능교?"

겨울에 스팀 때문에 냄새가 다 안빠졌나 봅니다.
크게 냄새가 난것도 아닌데 아이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나 봅니다. 순간 옆에 앉은 여학생과 제눈이 마주칩니다. 죄인을 취조하는 듯한 눈초리 입니다. 눈동자의 떨림 하나 하나까지 들여다보는 매서운 째려봄이 이어집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자는척을 합니다. 
다음역에서 내려야 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억울한 마음에 서러움이 밀려옵니다. 째려보던 여학생에게 무언가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생사람 잡는게 이런거구나 싶습니다. 마음속으로 크게 외쳐봅니다.
"애들아..나 아니거든...진짜로.."

살면서 억울할때가 가끔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공공의 적으로 몰릴때도 있습니다.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 매서운 사회의 눈초리에 슬퍼질때도 있습니다. 난 정말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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