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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12시 5분전

술취한 그림자.

by G_Gatsby 2009. 2. 22.


가끔은 저녁에 산책을 한다.
미련스러울만큼 게으른 나에겐 커다란 운동이 되기도 하고 낮에는 볼 수 없는 거리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지나가는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기 시작한다. 햇살아래 뚜렷했던 그림자는 어느새 가로등 불빛으로 희미한 윤곽을 유지한다. 겨울이 가고 있는 2009년의 한가로운 저녁이다.

시선 하나.

한 아저씨가 자전거를 끌고 간다.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금방 눈치를 챌 만큼 술에 취했다. 아직 어둠이 다 찾아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술에 흠뻑 젖었다. 더군다나 자전거까지 끌고 간다. 아저씨의 다리가 휘청거릴때 자전거도 함께 휘청거린다. 술취한 아저씨. 큰 소리로 뭔가를 외치며 걷는다. 이른 저녁에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그런데 이 아저씨 목소리가 참 낭낭하다.

가까이 다가간다. 아저씨의 욕짓거리가 귓가에 들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욕을 하는 대상이 귀에 익다. 요즘 라디오 DJ로 맹활약하고 있는 그분이다. 아마도 설치류에 속한다는 그분이 맞을 것이다. 순간 주위를 둘러본다. 다행히 주변에 전경버스와 제복입은 경찰은 보이지 않는다. 허허... 이분 참으로 勇子다.

아저씨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목소리는 선명해진다. 순간 아저씨의 앙상한 다리와 낡은 자전거가 시선에 들어온다. 거센 바람을 피하기엔 추워보이는 얇은 바지. 녹슬어 멈춰버릴것 같은 두바퀴의 자전거. 휘청거리는 아저씨의 구두 뒷굽은 닳을데로 닳았다. 아저씨의 뒷모습은 소리없이 많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너무도 힘든 세상을 걷고 있었다.

아저씨를 뒤로 하고 앞질러 간다. 무슨 사연과 불만이 있길래 술에 취했을까. 다시 뒤를 돌아 아저씨의 얼굴을 본다. 푹 패인 볼. 다듬지 않은 수염. 흰머리가 군데군데 볼품없이 자라 있다. 이미 아저씨의 눈은 우리와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듯 했다. 고함 치는 목소리와는 달리 표정은 거칠고 얼굴은 너무도 약해 보인다.

휘청거리며 걷던 아저씨가  불을 밝히는 가로등을 지나간다. 아저씨의 그림자가 세개가 되었다가 길게 늘어진다. 아저씨의 고단한 모습만큼 그림자의 길이도 늘어난다.

좁은 골목으로 아저씨는 사라졌다. 가로등이 없는 골목은 많이 어둡다. 아저씨의 커다란 목소리는 골목길로 들어서자 사라져 버렸다. 그의 삶의 무게가 전해주는 소리만큼 골목길은 휑하고 고요하다. 이제 더이상 아저씨와 함께 걷던 그림자도 사라진다. 아저씨의 지쳐버린 어깨와 한숨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기억 하나.

술에 취해 바라본 세상은 늘 부풀어 있었다. 기쁠때 술을 마시면 두배로 기뻤고 슬플때 술을 마시면 두배로 슬펐다. 적어도 내가 술에 취해 바라본 세상은 그런 것이었다. 세상은 조금 더 커보이기도 했고, 조금 더 작아 보이기도 했다. 생각으로 만들어 내지 못했던 감정은 폭발했고,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은 공허했다.

내가 꽤 좋아했던 선배 하나는 특이한 술버릇이 있었다. 술에 취해 길을 걸으며 달빛에 비추거나 가로등에 비취는 자신의 그림자를 마구 밟고 다니는 것이었다. 선배는 그것을 '그림자 밟기' 라고 불렀다. 그리고 꼭 술의 힘을 빌려서 그림자를 밟곤 했다.

밟으려고 해도 결코 자신의 발 밖에는 밟을수 없었다. 그래도 선배는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려고 했다. 그건 자신을 밟는거라고 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절망에 갇힌 자신을 밟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죽기전까지도 선배는 결코 그림자의 무게를 밟진 못했다. 치열하게 삶을 살다가 자신을 조금씩 갉아 먹는 암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두달만에 죽었다.

살아 가는 것이 힘들때가 있다. 때로는 술의 힘을 빌리기도 하고, 세상을 향해서 고함을 치기도 한다. 혹자는 경쟁에서 뒤쳐진 인생의 넋두리라고도 하고, 혹자는 가장 인간적인 삶의 모습이라고도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삶의 무게와 세상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것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늘 술에 취해서 세상을 바라보곤 한다.

술에 취해 바라본 세상은 언제나 공허했다. 삶을 쫓아 살아가는 것은 커다란 그림자를 남기곤 한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결코 거역할수 없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고통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곤 했다. 기쁨과 슬픔. 이 상반된 감정도 결코 고통에서 자유롭진 못할 것이다.

네온사인이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한다. 네온사인과 함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화려한 불빛을 따라 다시 돌아온다. 겨울바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아스팔트 위로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술취한 아저씨가 보여준 삶의 고단함이 함께 묻어 있는것 같다. 술을 먹진 않았지만 선배가 하던 그림자 밟기를 해본다. 밟히지 않는 그림자에, 오늘 본 풍경과 선배의 기억을 함께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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