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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12시 5분전

슬픈 노래를 듣다.

by G_Gatsby 2009. 4. 13.
지하철역앞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갑니다.
차를 타러 뛰어가는 사람,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전화를 하는 사람, 화장실이 급해서 뛰어가는 사람... 그리고 가끔은 벤취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차가운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안쓰러운 마음에 한번더 시선을 두게 됩니다.

잔뜩 찌푸린 하늘아래 왠 아저씨가 기타를 목에 걸고 있었습니다. 거리의 악사라고 보기엔 아저씨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습니다. 수백년전에 유행이 지나버린 다듬지 않은 장발머리, 꼬지꼬질한 겨울용 외투, 그리고 뒷굽이 보이지도 않는 낡은 구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아저씨가 손에 잡고 있는 것은 분명히 기타였습니다. 아저씨의 모습과 대비해서 기타의 모습이 너무도 선명해 보입니다.

예술가는 늘 가난하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붉게 충혈된 아저씨의 눈에는 무언가 외통스러운 고집이 보이는듯 했습니다. 아, 이것이 득도한 예술가의 눈빛이구나. 망설임 없이 아저씨 앞으로 갔습니다. 삭막한 도시생활에서 라이브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작은 행복입니다. 오늘은 참 운이 좋은 날입니다.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발을 멈추고 장발한 아저씨의 기타를 쳐다봅니다.

드디어 아저씨가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릅니다. 4분의 4박자 리듬입니다. 근데 노래가 '고래사냥' 입니다. 5년전 회식자리에서 수줍음 많이 타던 이과장이 술김에 부르던 바로 그 노래였습니다. 음정과 박자가 하나도 안맞습니다. 기타를 튕기는게 아니라 그냥 손바닥으로 박자만 맞춥니다. 속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시 멈추었던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제갈길을 갑니다.  당황스러워 저도 후다닥 자리를 뜹니다. 고래잡으러 떠나자는 아저씨의 갈라진 목소리가 자꾸 뒤통수로 날아옵니다. 뒤돌아 보니 아저씨의 얼굴이 술에 취한듯 보입니다. 자세히 보니 아저씨의 모습뒤로 비뇨기과의 간판이 보입니다. 순간 움찔 거립니다.



" 그림자 조차..."


시대를 비판하던 한 늙은 시인은 술에 취해 바라보는 세상이 가장 가슴아프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도 가슴이 아파 다시 술잔을 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가슴에 뭉쳐있는 슬픔이 하나가 되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노래를 부르던 아저씨의 모습에서 세상에 찌든 짙은 주름살이 보이는것 같습니다.

날이 어둑해져 돌아가는 길에는 아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저씨가 서 있던 그곳엔 또 다른 사람들이 힘에 겨운 하루를 보내려고 벤취에 앉아 있었습니다. 술에 취하고 세상에 취해 벌써 부터 고개를 숙이고 잠이 들려 하고 있었습니다. 또다른 힘겨움이 그곳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그 곳 벤취엔 이름없는 사람들의 궁색한 그림자가 깔리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 살면서 가장 슬픈것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 잊혀지고,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풍경이 되어가는 것 말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가장 큰 외로움이 그것인것 같습니다. 아저씨가 부르던 어설픈 노래가 갑자기 슬프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힘겨운 세상에 대한 외로운 노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 풍족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노곤한 벤취에는 어둠만이 짙게 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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