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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12시 5분전

여백의 노래

by G_Gatsby 2009. 4. 21.

비가 오고 난뒤에 느껴지는 쌀쌀함에 몸을 움추립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반팔을 입어야 했는데 비바람이 강하게 몰아쳤습니다. 마치 장마철 날씨처럼 매섭게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날씨가 참 좋을때도 있습니다. 건조했던 날씨가 풀리고,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 풍경

비가와서 흐려지는 창문너머로 이정표가 보이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걷습니다. 교복 바지를 둥둥 말아올리고 걷는 학생의 모습이 보입니다. 서둘러 택시를 타는 아저씨의 모습도 보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줍고 다니는 할아버지의 모습도 보입니다. 비가와도 풍경은 멈추지 않습니다.

화려하게 펴서 아름답게 빛나던 벚꽃나무 아래엔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에 뭉쳐진 꽃잎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답던 꽃잎은 이제 그 생명을 다한후 사람들의 발에 짓이겨져 버립니다. 아름답던 풍경이 지저분하게 변합니다.

도로에 비상깜박이를 켜고 택시기사와 손님이 서로 싸웁니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면서도 옥신각신 합니다. 체격이 작은 운전기사 아저씨를 향해 체격이 큰 손님이 때릴듯한 기세로 욕설을 퍼붓습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눈에 불을켜고 그 앞으로 다가갑니다. 손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슬쩍 저를 쳐다봅니다. 좌우 2센티 길이의 깍두기 머리에  인상이 많이 더티 합니다. 슬쩍 담배를 꺼내물고 택시를 바라보며 시선을 피해봅니다. 무섭습니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저씨는 비를 흠뻑 맞고 젊은 손님에게 욕을 듣고 있습니다. 작은 체격이지만 그래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단돈 몇천원의 택시비는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는 소중한 돈일것입니다. 저에게 돌아오는 시선을 용케 피하며 택시기사 아저씨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배만 피워댔습니다.

"젊은 사람이 입이 왜 그리 험하니?"


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깍두기 머리의 인상을 보니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깍두기 머리는 지갑을 열고 3천원을 땅에 던집니다. 퇴계 이황 선생님이 비에 흠뻑 젖어 버립니다. 묵묵히 택시아저씨는 비에 젖은 천원짜리를 하나씩 건져서 손에 쥐고는 긴 한숨을 내쉽니다. 아저씨의 새하얀 입김이 선명하게 흔적을 남깁니다. 그리고는 다시 운전대를 잡습니다.

택시가 사라지고 다시 길을 걷습니다. 뒤에서 모자를 쓴 할어버지가 리어커를 끌고 다가 옵니다. 리어커에는 비에 젖은 폐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비의 무게만큼 할아버지의 발걸음도 무거워 보입니다. 우산을 씌워 드리니 그저 허허 웃기만 합니다. 밀어드린다고 하니 그냥 놔두라고 합니다. 이빨이 몇개 남지 않은 입에서 연신 새하얀 입김이 나옵니다. 따뜻한 커피 한잔 드시라고 할아버지의 오래된 점퍼속에 지폐 몇장을 살짝 넣고 재빨리 도망칩니다. 비는 조금더 세차게 내리고 빨리 걷는 나에게도 새하얀 입김이 흘러 나옵니다.

여백의 노래.


 

삶의 여백을 노래하던 가수의 노래를 들어 봅니다.
'김광석' 이라는 이름을 들을때마다 마음이 아파옵니다. 채우고 채우고, 또 채우다 보니 정작 남아 있는 여백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욕심은 채워도 끝이 없고 상념은 채울수록 그 깊이를 더 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여백을 깨달을 시간조차 가지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변덕스러운 날씨속에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비가 오는 날씨속에 모두 뜨거운 입김을 내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속을 걸으며,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 내는 고단한 삶의 깊이를 생각해 봅니다.

화려했던 벚꽃이 떨어지고 나면 이내 잊혀지듯이, 우리들이 채우고 있는 모든것들도 때가 되면 잊혀지는것 같습니다. 그 많던 욕심도 뜨겁던 용기도 말이죠. 세상에 밟혀 버리고 사람에 버림받으며 어느새 나이를 먹어가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열정은 결코 사그러 들지 않는것 같습니다. 냉정한 시선에도, 혹독한 비바람에도 견디어내고 꾸준히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모두가 내뿜는 새하얀 입김을 보며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내쉬는 뜨거운 입김에서 삶의 여백을 느껴봅니다. 이러한 삶의 여백들이 모여 우리가 만들어 내는 풍경을 그려 봅니다. 그리고 그 풍경속에서 소박한 희망과 열정을 느껴봅니다.

삶의 여백을 노래하던 가수는 사라졌지만, 그가 부르던 노래는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볼순 없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는 풍경을 보며 여백의 가수가 부르던 노래를 오랫동안 들어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여백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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