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섭던 바람이 조금 잠잠해진 것 같습니다.
감기 몸살로 오랜 시간 투병을 했는데 날이 풀리니까 몸도 풀리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한가로운 산책을 나가봅니다.
거리를 수놓던 은행나무는 이제 겨울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노랗게 물들이던 잎사귀는 모두 사라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습니다. 나무 아래를 걷는 사람들의 움추린 모습 속에서도 겨울을 찾을수 있는 것 같습니다. 꽤 길고 추운 겨울이 되겠지요.
늙은 벤치의 기억
산책로를 따라 무작정 걷다 보니 눈에 띄는 색깔이 있습니다.
푸른 잔디가 사라져버린 그곳에 초록색으로 색칠한 벤치가 눈에 들어옵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아마도 삭막한 공원의 분위기를 위해서 초록색으로 페인트칠을 한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벤치에 앉아 봅니다.
산뜻한 색으로 갈아 입은 벤치의 모습은 멀리서 볼때와는 사뭇 다릅니다. 나무로 만든 벤치는 봄비와 가을비를 맞고 여름 햇살을 견디어 내면서 온갖 주름이 다 잡혀 있습니다. 새롭게 색칠을 했지만, 벤치의 모습은 가까이 보니까 아주 낡고 오래되었습니다.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은 변함이 없습니다.
전철이 지나가는 모습이 얼핏 보이고, 하늘을 향해 반짝이는 고층 건물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앉아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겠지요.
늙은 벤치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라본 풍경의 시선이 묻어 있었습니다.
세상을 원망하던 시선,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 하던 시선, 공부에 지친 아이들의 무거운 시선, 땀흘리며 운동한 사람이 바라보던 상쾌한 시선들. 늙은 벤치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청춘의 독서, 유시민의 기억
요즘 유시민씨의 책을 보고 있습니다.
<청춘의 독서> 라는 책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유시민씨의 책은 거의 모두 읽었던 것 같습니다. 참 글을 잘 쓰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정치인 유시민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글쓰는 유시민에 대해서는 참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책에서는 젊은 시절에 자신이 읽었던 책들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책에대한 소견과 자신의 소견을 말하고 있습니다. 책을 바라보던 작가의 시선은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확장되어 갑니다. 생각할 것이 많아지고, 이해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책의 내용은 변함없이 그대로 이지만, 책을 바라보는 작가의 생각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바라보는 풍경은 변함이 없지만, 바라보는 시선에는 미묘한 변화가 생깁니다.
어쩌면 좀 더 넓은 세상을 알아가는 단계인지도 모르지요. 또 어쩌면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보는 시선에 많은 여백들이 생긴 것 인지도 모릅니다.
<청춘의 독서>에는 세상을 살면서 더하고 빼고 난뒤에 남은 작가의 시선이 묻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작가의 신념이겠지요. 그리고 그 신념은 또 다른 결심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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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돌아올수 없는 바보 대통령의 늙은 벤치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풍경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주름진 틈새에서 묻어나는 사람사는 냄새를 맡아 봅니다. 편안한 휴식과 내일을 위한 새로운 용기를 얻을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늙은 벤치에 새로운 색을 칠해야 하겠죠. 청춘의 독서의 작가는 힘든 싸움을 시작하려나 봅니다.
굳기 시작한 땅에서 차가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땅 속에도 다시올 봄날을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는 작은 생명들이 있겠죠. 삶의 열정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횡단보도에서 발걸음을 멈춥니다.
옆에 있던 어린 여자 아이가 내 얼굴을 자꾸 쳐다봅니다. 오랜만에 면도도 했는데 왜 자꾸 쳐다보는지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돌려서 아이의 얼굴을 쳐다봅니다.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외칩니다.
‘ 뭘 봐 이~ 빵꾸똥꾸야! ’
때로는 나이 먹는게 서러울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살면처 참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때도 가끔 있는 것 같습니다. 사는게 참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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