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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길을 걷다

흑백의 거리.

by G_Gatsby 2010. 4. 14.


새로운 건물이 우뚝 솟아 있는 도심의 사거리.
사거리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오래된 건물들이 쓰러질듯한 모습으로 일렬로 서있다.
개발자의 이기심 때문인지, 남아 있는 자들의 욕심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보여지는 풍경은 기묘하다. 몇 가구 안되는줄 알았는데 길을 걷다 보니 꽤 길게 늘어서 있다. 주위에는 대형 광고판을 부착한 건물들과 아파트가 즐비한데 이러한 곳이 여기 숨어 있다니 신기 하다. 색이 바래고 오래된 거리를 바라보니 마치 흑백영화를 보는듯 하다.

미닫이 문이 있고, 연탄 화덕도 보인다.
고물상도 있고 경사가 심한 골목길도 보인다.
낮은 창문 아래엔 아이들이 저질러 놓은 낙서가 있고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 위에는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가 낮잠을 잔다. 도심에서 들려오는 소음마저 이곳을 비켜 나가듯 한적하고 조용한 흑백의 거리다.



내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연탄 집게를 들고 미닫이 문을 나선다.
요 며칠 추위가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할아버지가 신은 보라색 슬리퍼도 햇빛에 바래 요란하다.
쓰러질 듯 위태로운 철제 대문을 열고 깔끔하게 차려 입은 한 청년이 나온다.
주위를 한번 살펴 보더니 뚜벅뚜벅 큰 길로 재빠르게 걸어간다.
청년이 내는 구두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퍼진다.

길게 늘어져 있는 흑백 풍경을 벗어나니 소음과 함께 화려한 풍경이 펼쳐 진다.
깔끔하게 차려 입은 청년은 사람들에 섞여 분주하게 길을 걷는다.
흑백의 풍경에서는 선명하게 들리던 청년의 구두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천천히 천연색의 풍경을 돌아 보는 사이에 어느덧 청년은 군중 속으로 사라져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천연색의 풍경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어쩌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흑백의 풍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보이는 것이 중요한 세상에는 감춰야 할 것들이 많아 진다.
그래서 마음 속 어딘가에는 흑백의 풍경들을 감추어 두고 사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시선이 닿기가 두려워 지는 흑백의 풍경.
발전하고 커져 가는 세상 속에 점점 더 초라해 지는 흑백의 풍경.
세상의 이기심과 자신만의 욕심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흑백의 풍경.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색깔이 이런 모습인지도 모른다.
보여지기 위한 것과 숨겨야 할 것,
알량한 지식과 비겁한 용기,
부질없는 욕심과 편협한 생각.
배타적인 생각과 옹졸한 이기심,
불편한 진실과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모습이 흑백의 풍경과 묘하게 닮아 있다.

도심 속에 숨겨진 기묘한 흑백 풍경을 뒤로 하고 천연색 거리의 사람들 속에 섞인다.
나 또한 천연색 풍경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분명하게 깨닫는다.
혼자 있는 시간이 찾아 오면 또다시 흑백 풍경 속에 서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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