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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길을 걷다

자전거가 있는 풍경

by G_Gatsby 2010. 5. 19.

모터를 단 자전거가 옆을 지나간다.
일흔살이 넘은 할아버가 운전대를 잡고 있고, 일흔살이 넘은 할머니가 뒤에 타고 있다.
할머니의 뒤로는 시장에서 사왔는지 작은 새 냄비가 떨어질듯 매달려 있다.

할아버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앞을 바라본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등뒤에서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본다.
서로의 체온을 믿고 의지한채 노인을 태운 자전거가 골목으로 사라진다.

# 1

노인들이 들어간 골목길로 방향을 잡는다.
철거가 진행중인 골목의 풍경은 스산하고 음산하다.
접근 금지를 알리는 푯말이 등장하고, 사람들이 떠난 건물의 유리창에는 거미마저 줄을 치지 않는다.
주인을 잃어 버린 의자는 이미 한쪽 다리를 잃었다.
고철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할아버지의 덥수룩한 수염이 등장하고,
폐지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할머니의 낡은 리어카가 사라진다.
술주정하던 아저씨가 갑자기 내미는 햇살에 정신을 차리고,
나이키 신발을 신은 오토바이 배달원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사람이 떠난 곳의 풍경에는
아슬아슬한 삶의 무게를 견디고 오늘을 버텨내는 또 다른 사람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 2

철거촌을 지나자 커다란 공원이 나온다.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푸른 잔디위에서 뛰고 있다.
떡볶이를 만드는 아주머니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고, 배드민턴을 치는 배나온 아저씨의 발놀림도 예사롭지 않다. 산책나온 강아지는 주인의 발꿈치에 매달려 재롱을 떨고 양복입은 아저씨는 그늘진 벤치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아저씨가 신은 신발의 이 예사롭지 않게 빛난다.

갑자기 세발자전거를 탄 아이들이 골목에서 나와 공원으로 향한다.
작은 세발자전거 탄 아이의 뒤에 또 다른 아이가 매달리듯 앉아 있다. 대로를 건넌 아이는 잠시 멈춰 뒤에 있는 아이를 돌아본다. 뒤에 앉은 아이의 환한 웃음을 확인한 후에 다시 패달을 밟는다. 뒤에 앉은 아이는 운전하는 아이의 허리에 손을 잡는다. 서로의 체온이 따사롭게 느껴진다.
해는 가라앉고 푸른 잔디위로 아이들의 그림자가 살포시 내려 앉는다.



철거민들의 사진만을 찍던 어느 사진작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는 그곳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잃어 버린 희망, 사람들이 남겨 놓은 체온, 사람들이 만들고자 했던 사랑이 그것이었다.

노구의 사진작가는 우리가 살던 골목 곳곳에 놓여 있던 따뜻한 체온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익숙한 풍경이 사라진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힘겨운 삶을 버텨내던 사람들의 고된 눈물이었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함께 달리던 노인의 풍경을 다시 그려 본다. 그리고 동생을 태우고 달리던 아이의 듬직한 미소를 생각해 본다. 사랑의 체온은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우리들의 주변에서 맴돌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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