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은 확실히 변화하고 있다
창비주간논평. 2008-05-21
서재정 / 미 존스홉킨스대 교수
북미관계 개선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미 국제개발처는 북한에 대규모 식량지원을 한다고 발표했다. 미 의회는 유예조치를 만들어 북한에 대한 재정지원이 가능하도록 법적 준비를 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테러지원국 명단과 적성국 교역법에서 북을 제외하기 위한 최종준비에 나서고 있다. 미국 행정부와 입법부가 유례없이 손발을 맞춰가며 북핵 폐기와 북미 관계정상화로 성큼 나서고 있는 것이다.
5월 16일 미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는 50만톤 규모의 대북 식량지원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미국과 북한은 지난가을부터 수개월 동안 협의한 끝에 "미국과 북한은 대북 식량지원 재개 프로그램의 기준들에 대한 합의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미국은 2005년말 중단됐던 대북 식량지원을 2년반 만에 전격 재개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 행정부와 입법부의 북미관계 협조
북한은 즉시 화답했다. 미 국무부가 식량지원을 발표한 지 12시간 만에 북한 중앙통신은 "미국 정부의 식량지원은 부족되는 식량 해결에 일정하게 도움이 될 것이며, 조미 두 나라 인민들 사이의 리해와 신뢰증진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북핵 6자회담에 따른 북핵 신고도 이달 중 진전이 예상돼 북미간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것이다.
이에 하루 앞선 15일 미 하원은 북한 비핵화를 위한 일련의 과정에 행정부의 예산지원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정부는 핵실험을 실시한 국가에 재정지원을 금지하는 '글렌 수정법' 때문에 북한의 비핵화 지원을 위한 예산 집행도 제한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법안에서 북한을 적용대상에서 면제해주는 규정을 만든 것이다. 상원 군사위도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미 에너지부와 국방부에 무기수출통제법 적용에 대한 제한적인 면제권한을 부여하고 5천만달러의 예산을 북한 비핵화 지원 예산으로 배정토록 했고 상원 외교위도 글렌 수정법 유보조항을 마련하고 있어, 조만간 하원의 법안과 유사한 법안을 통과시킬 조짐이다. 민주당이 다수를 점하는 의회가 나서서 기존 미국법의 유보조항을 만들 정도로 비핵화 지원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일주일 전에는 미 국무부 성 킴 한국과장이 1만 8천쪽에 달하는 북핵시설 가동기록을 북에서 받아들고 왔다. 시리아 핵발전소 건설을 지원했다는 의혹 때문에 주춤했던 북한 비핵화가 완연히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시리아 의혹'이나 '우라늄 의혹' 때문에 북한 비핵화를 지연시키기보다는, 현존하고도 시급한 영변 플루토늄시설 동결을 완결짓고 폐기의 수순을 밟기 시작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현저해졌다. 그 일환으로 북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는 조치가 조만간 실시되고 이를 전후해서 북이 핵활동 보고서를 제출하면, 6자회담이 재개되어 3단계인 핵폐기와 관계정상화가 구체화될 조짐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외교경쟁'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주 카네기국제평화재단에서 열린 토론회는 주목할 만하다. 일부 한국 언론에서는 갈루치 조지타운대 학장이 시리아 문제가 심각하다고 주장했다는 점만 강조해서 보도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부분은 제네바합의를 깨고 '북핵문제'를 악화시킨 부시 행정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갈루치 학장은 클린턴 행정부에서 어렵사리 합의를 만들어놨는데 그걸 깨뜨리니 그 결과가 어떠냐며 각을 세웠다. 자신이 주도했던 제네바합의의 성과를 부시 행정부의 실패와 시종 대비했다. 경수로 제공도 결국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충고도 곁들였다.
갈루치 학장이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실패에 노발대발하도록 멍석을 깔아준 것은 사실 그보다 앞서 발표한 칼 포드 전 국무부차관이었다. 부시 행정부 1기 국무부차관이었던 그는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는 국방부 차관보로 근무했던 공화당 원조보수다. 토론회 주최측이 공화당과 민주당의 견해를 대비시키려 한 의도가 확연한 부분이다. 역시 그는 주최측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갈루치보다 더 튀는 발언을 했다. "북이 행동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북의 행동에 대응하는 방식은 지금까지 실패했다. 우리는 북의 행동에 상관없이 먼저 행동해야 한다."
필자는 숨을 죽였다. "아니, 아직도 선제공격론……"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발언은 그런 상투적 예상을 뛰어넘었다. "북을 관통하는 철도를 건설하라." 그는 인도적 지원 정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규모 경제재건 지원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저것 까다로운 조건을 붙일 필요 없이, 북의 예상을 뛰어넘는 지원을 해보라고, 기존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히지 말고 과감한 창조적 발상이 필요하다는 말들이 이어졌다. 북이 핵신고를 하고 핵폐기를 하고 다른 조치들을 취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국이 선수를 쓰라는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협상과 외교적 해결을 강조하려던 갈루치 전 제네바 핵협상 대표가 포드 전 차관의 파격적인 발언에 '선제공격'을 당한 꼴이 되어버렸다. 그는 준비해온 원고는 서둘러 대충 읽고 넘어갔다. 이어 포드 전 차관의 발언에 말꼬리를 잡으며 더 강경한 발언으로 반격에 나섰다. 토론장은 누가 더 강력히 외교와 협력을 지지하는지 경쟁하는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한국은 어디 있는가?
워싱턴의 분위기는 이미 변했다.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외교적으로 해결하라는 것이다. 최고의 급선무인 북의 플루토늄프로그램 동결을 조속히 완결하고 폐기의 수순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북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도 제외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세를 손바닥으로라도 막아보려는 일부 강경 공화당 의원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의회 주도권은 이미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포드 전 차관의 발언이 보여주듯 공화당 인사들도 북미외교에 적극적이다. 워싱턴의 변화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가역적'인 듯하다.
미국은 행정부와 의회가 손발을 맞춰가며 북 비핵화와 북미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고, 미 정부 밖에서도 협력과 관계개선의 목소리가 높다. 이에 비해 한국 이명박정부와 국회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미국에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한반도 비핵화에 한국이 당사자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당연한 실용적 목소리도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 어디 있는가?
[출처 : 창작과 비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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